조갑룡 한국창의영재교육원 상임이사·전 부산영재교육진흥원장
조갑룡 한국창의영재교육원 상임이사·전 부산영재교육진흥원장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자기의 관심이 쏠리는 것을 찾았고 그것에 열중했다. 자꾸 생각했다. 밥도 안 먹고 했다.` 양자역학에 빠진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의 얘기다. 빛의 입자-파동 이중성은 물론 슈뢰딩거의 파동 함수에 대해서도 꿰뚫고 있다.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은 너무 싱겁다. 수업시간에 딴 생각 하고 엉뚱한 질문을 하는 바람에 친구 사이에서는 거의 왕따 수준이며, 아이의 질문에 선생님도 버겁다. 학교가 끝나면 집으로 달려가 밤이 늦도록 자기방에 틀어박혀 전문서적과 인터넷을 뒤적이고 계산하고 메모하면서 낑낑거린다. 첨벙대며 놀라고 감동하는 이 아이의 열정과 몰입을 어떻게 해야 할까? 아이의 지적 호기심을 받쳐주지 못하는 교육과정에 비범한 아이를 묶어두는 건 슬픈 일이다. 영재교육이 필요한 이유다.

`아이 이름이 한결이라 그랬지요? 예! 이 한결이요. 유치원은 처음이니까 많이 가르쳐 주세요. 처음이라구요? 그럼 여기 오기 전에 영재교육 뭐 뭐 했어요? 예? 영재교육이요? 노벨센터에서 했어요, 아니면 에디슨에서 했어요? 아니요, 전 아무것도 안 했어요. 어떻게 아이한테 아무것도 안 시키고 방임할 수 있어요?` 연속극의 한 장면이다. 영재교육을 누구나 거쳐야 하는 과정쯤으로 알고 있다. 이런 부모들은 아이가 상급 학교로 가면 암기에 익숙한 문제 잘 푸는 귀신 얘기로 꽃을 피우고 특정 고등학교에 가기 위한 선행학습을 영재교육이라 치부한다.

영재교육은 아이들의 감정이나 재능으로 인해 정규학교 교육과정이 감당하지 못하는 독특한 학습요구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며, 최적의 학습 도전감을 경험하게 해주는 맞춤식 교육이다. `화가로서의 탁월한 영재성을 가진 아이들이 모두 화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개인의 잠재력은 그에 적합한 경험의 기회를 누릴 수 있을 때 비로소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라는 가드너의 말처럼, 교육을 아이들 저마다의 소질과 적성에 맞는 학습경험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라면 영재아를 위한 특수교육은 장애아를 위한 특수교육만큼이나 충분한 대중적 정당성을 갖는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 시대 영재교육의 방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4차 산업혁명이 가져올 사회 변화와 속도는 3차 산업혁명의 10배, 규모는 100배, 임팩트는 3,000배라고 한다. 많이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인공지능의 몫이다. `앎`이 세상에 뒤쳐지는 시대에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 이게 영재교육이 추구해야 할 바이다. 이제는 지식의 재생산이 교육에 있어서 성공을 의미할 수 없다. `기업가 정신`과 같은 현대적 지식을 잘 조합하여 새로운 산출물을 만들어 내는 능력자로서의 연습을 하는 것이 영재교육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할 줄` 아는 게 아니라 `써먹을 줄` 아는 게 중요하다.

아무튼, 헌법 제31조에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차이를 인정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차별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차이`를 `차별`로 혼돈하고 있다. 출중한 재주를 보이는 아이들은 그 재능을 살릴 수 있는 수준의 담금질을 해야 한다. 즉, 영재아를 위한 맞춤식 교육은 차이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영재교육은 개별 학생이 다다를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성취를 이끌어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영재교육은 자신과의 경쟁이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남과 다른 것을 두려워하고 뭐든 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어깨를 누른다. 이는 기존 지식의 소비를 두고 벌이는 타인과의 경쟁일 뿐, 나의 탁월함은 자신과의 경쟁 속에서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게 영재교육이 필요한 이유다. 나를 보여줄 때 삶은 빛난다고 했던가!

조갑룡 한국창의영재교육원 상임이사·전 부산영재교육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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