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범경 한국원자력연구원 해체기술연구부장
서범경 한국원자력연구원 해체기술연구부장
세종은 어리석은 백성이라도 제 뜻을 쉽게 펼 수 있도록 `한글`을 창제했다. 훈민정음해례본에는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깨우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만에 익힐 수 있다`라는 예조판서 정인지의 글귀가 실려있다. 아이에게 한글을 가르쳐본 입장에서 아침나절, 열흘 만에 한글을 익힌다는 데서는 고개가 조금 갸우뚱해진다. 그러나 당시 한글은 오늘날 SNS만큼이나 그 시대 백성의 소통 방식을 획기적으로 바꾸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새로운 문자가 만들어지고 정보전달 수단을 갖게 돼 백성들의 소통은 더욱 쉽고 풍성해졌을 테니 말이다.

요즘에는 문자 메시지가 주요 소통수단이 되면서 다양한 신조어·줄임말을 사용하게 된다. SNS를 통해 학생들이 주고받은 메시지를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도저히 해석할 수 없는 외계어로 보였다. 필자에게 아직도 그 내용은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이러한 세태를 따르고자 카페에서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나 `따아(따뜻한 아메리카노)`로 주문을 시도하곤 하지만, 가끔 바리스타의 뜨거운 시선을 마주하면 조금 민망한 느낌도 든다. 이런 신조어 또는 줄임말을 사용하면 같은 문화를 공유하는 친구들 사이에서는 더 큰 친밀감을 느낄 수 있겠지만, 다른 세대와의 소통은 점점 어려워진다. 언어라는 것이 사회적 약속이기 때문에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소통 자체를 방해하는 특정 집단만의 언어 사용에 대해서는 한 번 더 생각해봐야 할 일이다.

최근 소통이 사회적 화두가 되면서 과학계도 일반인과 직접 대화하고 교류할 일이 많아졌다. 여전히 전문용어로 무장해 일반인과 선을 긋고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당장 필자가 연구하고 있는 원자력발전소 해체 분야만 보더라도 `Decontamination(제염)`, `Decommissioning(해체)`, `Remediation(부지복원)`, `Clearance(자체처분)` 등 단어 자체만으로는 다른 뜻으로 오해할 수 있는 용어를 많이 사용한다. 쉽고 정확한 단어로 바로 대체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지만, 독자와 청자의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노력한다면 더 쉽게 전달할 방법이야 얼마든 있을 것이다.

원활한 소통은 같은 배경지식 위에서 동일한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이뤄진다. 어려운 용어를 통해 자신을 돋보이고 싶을 때도 있겠지만, 상대방에게 무언가를 설명하고 이해를 구할 때는 철저하게 상대방의 배경지식과 언어에 맞춰야만 한다. 마주 보고 자기주장만을 늘어놓을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실어 전달해야 한다. 원활한 의사소통이 얼마나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지에 대해 인류는 이미 오래전부터 깨달았던 듯하다. 바벨탑의 전설에서는 모든 사람이 같은 언어를 쓰던 시절, 천국에 가까이 가기 위해 힘을 모아 거대한 탑을 쌓는 오만을 부리다 신의 분노를 사고 만다. 결국 신은 힘의 근원이며 소통의 수단인 언어를 인간에게서 빼앗아 버린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양반도 글을 자신만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기반으로 여겨, 백성이 문자라는 도구를 갖고 소통하는 것을 끝까지 반대했다.

바벨탑을 짓던 그 세상처럼 모든 사람이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세상이 온다면 어떨까. 1887년 폴란드 안과의사 라자로 루도비코 자멘호프는 국제적 의사소통을 위한 공용어로 `에스페란토`라는 인공어를 발표한 바 있다. 영어 울렁증이 있던 필자도 한때 에스페란토를 배우는 것은 어떨까 하고 기웃거린 적이 있었는데 금세 포기하고만 기억이 있다. 하지만 에스페란토의 목표처럼 꼭 에스페란토가 아니라도 온 인류가 하나의 언어로 소통하는 세상이 온다면 정말 어마어마한 집단지성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해본다. 마지막으로 조금 거부감이 있을 수 있겠지만, 요즘 유행하는 신조어 및 줄임말로 글을 마칠까 한다. 앞으로는 `아묻따(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음)`하고 주변에 있는 모든 이들과 더욱더 `불소(불타는 소통)`해봅시다. 서범경 한국원자력연구원 해체기술연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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