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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가산책] ‘창백한 푸른점(The Pale Blue Dot)’

2021-01-26 기사
편집 2021-01-26 07:4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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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사진1황재섭 대전시립무용단 예술감독
우주선 '보이저호'가 본연의 임무를 다하고 그 기능이 정지해 갈 즈음, 천문학자 칼세이건(Carl Sagan)은 도발적인 발상 하나를 품게 된다. 카메라의 방향을 돌려 지구모습을 촬영하길 희망한 것이다. 과학적으론 그다지 주목할 만한 성과가 없을지라도 인류가 살아가고 있는 별의 모습을 스스로 직접 확인했을 때의 의미 또한 남다를 것이란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리고 태양의 강렬한 빛으로 인해 카메라의 오작동이 예견된다는 많은 과학자들의 우려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를 지지해준 나사(NASA)의 한 행정관의 뜻에 의해 해왕성을 지나가고 있던 보이저호의 카메라는 마침내 지구를 향하게 된다. 그런데 6만 4000개의 점(pixel)들이 5시간이 넘는 광속도로 하나씩 전송되던 지루한 작업의 결과물은 우리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초라한 형상으로 완성됐다. 광활한 우주 속에 자리한 창백하고도 너무나 작은 하나의 푸른 점, 그것이 지구였다. 이미 오래전부터 고대의 과학자나 철학자들을 통해 예견된 일이기는 했으나 막상 우리 앞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지구의 모습은 그렇게 광대한 우주의 경외로움과 대비되는 한없는 왜소함 자체였던 것이다.

플라톤은 '국가론' 제7권에서 '동굴의 비유'를 통해 이데아의 세계와 현실 세계를 대비해 놓았다. 동굴에 갇혀 그림자만 감각으로 인지한 인간은 그것을 현실세계로 인식할 수밖에 없기에 동굴 밖 진짜의 세계 즉, 이성적 인지를 통해 이데아의 세계를 보아야 한다는 설명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칼세이건의 저서이기도 한 '창백한 푸른점(The Pale Blue Dot)'에 등장하는 한 장의 사진을 보며 "플라톤이 지금 살아있었다면 이데아의 세계에 대한 설명은 좀 더 달라지지 않았을까?"를 생각해 본다. 과학이 세상을 규명 짓는 중요한 잣대가 되기 이전의 세상은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의 진리를 이성적으로 유추해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양자역학 등 미시적인 세계까지 증명해낼 수 있게 된 21세기 현실은 이제 보다 견고한 그 이상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이 우리네 삶이든 철학이든 매 한가지이며 무대예술을 업으로 삼고 있는 필자의 현실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필자는 근래, 존재하는 것과 인간세계의 관계적 실체가 설명 가능한 공간에서 차기작의 근거를 찾고 있다. 아득한 날에 이미 인간사와 우주의 섭리까지 간파한 대철학자의 이데아보단 삶과 죽음이 평범해지고 하루하루가 사건의 연속인 작금의 현실 공간에서 삶을 논하고 싶기 때문이다.

최근에 다시금 마주하게 된 '창백한 푸른점'의 사진들은 지금의 우리를 너무나 잘 설명해주는 상징처럼 보인다.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이야 어떻든 간에 그동안 지구는 우리에게 너무나 거대한 세계였고 수십억 년 시간을 질긴 생명력으로 이어준 절대적인 존재였다. 130억년 우주의 나이에 비하자면 너무나 찰나적이며 천억 개가 넘는 은하의 한 켠에 불과한 이곳, 그러한 지구에서 이제 또 다른 한 해가 시작되고 있다. 미시에서 거시를 찾는 항해가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우주에서는 비록 창백한 하나의 푸른 점에 불과할 지라도 그 점안의 우리는 아주 특별한 존재이다. 그래서 올 상반기 차기작은 미시와 거시의 세계가 공존하는 저 작은 푸른점에 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황재섭 대전시립무용단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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