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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가산책]박용래 시인과 청시사(靑枾舍) 옛터

2020-09-15기사 편집 2020-09-15 07:0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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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사진1홍인숙 대전대 교수·시인
올해는 대전에서 활동한 시인이자 "눈물의 시인"으로 잘 알려진 박용래 시인이 타계한 지 40주기가 되는 해이다. 최근 여러 지면을 통해 박용래 시인을 추억하고 문학세계를 재조명하는 다양한 연구가 시도되고 있다. 특히 대흥동 소재의 충남도지사관사촌 "테미오래"에서는 대전문학기록 아카이브 특별전으로서 박용래 시인의 전시관을 상설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가장 시인다운 삶을 산 시인"으로 기억되는 박용래 시인의 시적 발자취를 살펴볼 좋은 기회이다.

보문산 사정공원에 가면 대전·충남지역에서 활동하면서 문학적 업적을 남긴 시인들의 시비를 조성한 장소가 있다. 박용래 시인의 시비는 가장 최근에 세워진 임강빈 시인의 시비 바로 위쪽에 있다. 그의 시비를 바라보면 문득 청동 투구를 쓰고 산하를 수호하는 듯 결기 있는 장수의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 때문에 '눈물점'으로 불리고,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울음을 울어 '눈물의 시인'으로도 기억되는 시인 생전의 섬세한 모습과는 달리 그의 시비는 자못 위풍당당하기까지 하다. 그 시비에 새겨진 시가 바로 '저녁눈'이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말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김춘수 시인은 일찍이 박용래의 시 '저녁눈'에 대한 시평을 통해 "시가 너무 투명하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훤하기만 하다. 누가 이 시에 대해 무슨 말을 한다면 그건 한갓 군소리밖에 안 될 것"이라는 말로 박용래 시의 정수를 표현했다. 시인은 시로써 말을 하는 것이라 단언했던 박용래 시인, '저녁눈'은 세상의 온갖 영욕 따위와는 애당초 어울리지 않았던 박용래 시인의 예술혼을 들여다볼 수 있는 단초가 아닐까?

이 아름다운 시 속에 담긴 '말집'이 있고 '조랑말'에게 먹일 '여물'을 써는 그 '변두리' 동네가 바로 중구에 있는 오류동이다. 1925년 강경에서 태어난 박용래 시인이 강경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대전에 자리를 잡으면서 평생 살았던 곳이다. 대문 옆에 감나무가 한 그루 있어서 택호를 푸른 감나무가 있는 집이라는 뜻의 "청시사(靑枾舍)"로 지었다고 한다. 사시사철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문인들이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는 시인의 옛집이다.

"대전 근현대문학의 초석을 다지고 평생 시적인 삶을 살다간 맑고 순수한 시인"으로 소개되고 있는 박용래 시인이지만 대전에서 그의 생의 자취가 남은 곳은 거의 없다. 시인이 살았던 오류동 옛집은 그가 타계한 후 이미 누군가에게 넘어갔고, 그 뒤 중구청에서 매입하여 공영주차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형편이라 집터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다행히 주차장으로 변경될 때 여러 뜻있는 문인들이 힘을 합쳐 주차장 내 한쪽 귀퉁이에 작은 표지석이라도 세운 것이 시인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빛으로 남았다.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오류동의 銅錢'이라는 명시가 새겨진 박용래 시인의 옛 집터 표지석이 너무나 후미진 곳에 있어서 일반인들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지리적 위치에 의미를 두는 것이 예술적 가치를 더하는 일이라고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물리적으로 기억할 장소가 있다는 것은 의미의 폭이 크다. 박용래 시인의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오류동 옛 집터 근처에 안내판이라도 하나 달아냈으면 하는 마음만 붐빈다. 홍인숙 대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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