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11월 1일 전시속보판 [사진=대전일보DB]
1950년 11월 1일 전시속보판 [사진=대전일보DB]
신문은 시대의 창(窓)이자 눈이다. 어두운 그늘을 들추고 빛을 새겨 넣는다. 과거를 궁리하며 미래를 통찰한다. 대전일보는 그렇게 반세기를 넘어 70년 세월을 묵묵히 걸어왔다. 격랑 속에서도 바른 입과 곧은 펜은 꺾이지 않았다. 대전일보의 세월 속 지면에는 충청의 근현대사가 고스란히 담겼다. `민족사의 진실한 기록자가 된다`는 대전일보의 첫 번째 사시(社是)다.

태동은 70년 전 1950년 11월 1일로 돌아간다. 16절지 크기 1장짜리 전시속보판이었다. 이마저도 빵집 2층의 좁은 공간에서 만들어냈다. 임시제호는 `대전일보(大田日報)`, 가격은 20원이었다. 머릿기사에는 `유엔 해군기(海軍機) 적진을 맹공, B29편대 청진을 폭격`이란 기사가 실렸다. 전쟁상황을 생생하게 담아낸 대전일보는 불티나게 팔렸다. 그때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였다. 피란민은 남행길을 택했고, 대전·충청도민은 삶과 죽음을 넘나들고 있었다. 신문도 제작하기 어려웠던 때다. 1951년 1월 신문을 보면 당시의 열악한 상황이 느껴진다. 물자가 워낙 귀해 종이를 구하는 게 하늘의 별 따기였다. 1월 9일자부터 17일자까지 신문은 A4용지 크기 마분지로 발행됐다. 최후의 순간까지 신문을 펴내겠다는 언론인의 긍지였다.

자유민주주의 수호도 대전일보의 기치였다. 국민과 시민의 편에 서서 4·19혁명의 영광, 5·16과 10·26의 시련을 함께한 것은 물론, 1975년에는 정부의 권위주의에 대항하다 지방 신문으로서 유례 없는 국세청 본청의 세무조사를 받기도 했다. 언론사를 대상으로 한 최초의 세무조사였고, 언론탄압으로 비쳐졌다. 이는 오히려 대전일보의 올곧은 심지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정론지로서 자리를 굳히는 계기가 됐다. `인간 존엄과 사회정의를 받든다`는 대전일보의 두 번째 사시다.

1990년대 접어 들면서 언론계는 양적 팽창하게 된다. 자유·민주화 바람이 거세게 불며, 신규 언론사 설립의 움직임이 두드러졌다. 무한경쟁시대에 돌입했고 대전일보는 주독지(主讀紙)로서 대응에 나섰다. 지역의 각종 현안에 대안을 제시하고 여론을 환기시키는데 힘썼다. 생활정보지인 대전플러스를 발행하거나 조르주 루오 작품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2016년 10월에는 93일 간 `대전 국제포토저널리즘전(展)`을 개최해 유럽 최고 권위와 명망을 자랑하는 프랑스의 `비자 뿌르 리마쥬-페르피냥 (Visa pour l`Image-Perpignan)`을 국내 최초로 유치하기도 했다. 대전일보의 마지막 사시는 `국리민복과 문화 창달에 나선다`이다.

이제 새로운 출발점에 섰다. 매체가 범람하고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다. 끊임없는 사고를 통해 획기적인 뉴스콘텐츠로 독자와 시대를 마주해야 한다. 지방분권화시대의 흐름속에서 지역 경쟁력을 높이면서도 국격을 바로 세워야 한다. 대전일보는 지난 70년 간 기록을 도움닫기 삼아 앞으로의 100년을 준비할 것이다. 그리고 더 넓어진 창과 깊어진 눈으로 다시금 도약할 것이다.김대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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