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담은 조선의 정물화 책거리-정병모 지음/ 다할미디어/ 300쪽/ 2만 원

세계를 담은 조선의 정물화 책거리
세계를 담은 조선의 정물화 책거리
책거리는 조선 후기에 발달한 정물화이면서 유교 이념의 나라 조선이 물질문화를 받아들인 변화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시대의 표상`이다. 정병모 경주대 문화재학과 교수가 한국 채색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책거리의 모든 것을 책 한 권에 담아냈다.

이 책은 책거리가 탄생하고 성행한 역사적, 사회경제적, 문화적 배경을 다루는 동시에 젠더적 표현과 우주적인 상상력, 현대적인 표현 기법에 이르기까지 오늘날까지도 세계적으로 사랑받을 수 있었던 책거리 특유의 모더니티를 해부한다.

조선 시대에도 책거리라는 정물화가 있었다. 하지만 서양의 정물화처럼 일상적인 물건이나 꽃을 그린 것이 아니라 책으로 특화됐다. 세계 각국의 정물화 가운데 명칭에 `책`이란 키워드가 들어 있는 것은 조선의 책거리가 유일하다.

책거리에는 책을 비롯해 도자기, 청동기, 꽃, 과일, 기물, 옷 등이 등장한다. 한마디로 책과 물건을 그린 정물화다. 조선에서는 18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까지 정물화가 성행해 200년 남짓한 시간 동안 왕부터 백성까지 폭 넓게 책거리를 향유했다.

문치 국가인 조선 시대에 책은 특별한 존재였다. 하지만 책이 아닌 물건에 대한 조선 선비들의 생각은 매우 부정적이다. 검소함을 최고의 덕목으로 여긴 조선에서는 물건이 사치풍조를 불러일으키는 빌미를 제공한다고 여겼다.

도덕과 이념으로 무장한 조선 시대에 상반된 가치의 책과 물건이 공존한 그림이 출현했으니 바로 책거리다. 이 그림에 고고한 책과 통속적인 물건이 함께 담겨 있다. 이는 조선 후기의 양면성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는 상징적인 풍경이다. 겉으로 보면 정신문화와 물질문화가 조화로워 보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물질문화가 정신문화에 기대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조선 후기에 비로소 현실적인 물질문화에 대한 욕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념과 의리만으로 더는 조선의 경제를 버틸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궁극적인 행복은 정신 안에 있지만 물질이 배제된 인간의 행복은 실질적으로 어려운 것이다. 그 현실적 욕망이 응집된 그림이 바로 책거리다. 이 그림은 `이념의 시대`에서 `물건의 시대`로 옮겨가는 변화의 신호탄이다.

책거리는 조선 후기에 유행한 물질문화의 총화다. 궁중화 책거리에서는 당시 청나라로부터 수입한 화려한 도자기들과 자명종, 회중시계, 안경, 거울, 양금 등 서양의 물건까지 보인다. 이들 물건은 대항해시대의 무역품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책거리는 대항해시대와 조선 후기의 역사가 담겨 있는 `세계를 담은 정물화`인 것이다.

민화 책거리에서는 점차 중국이나 서양의 물건에서 벗어나 조선의 물건으로 바뀌었다. 아울러 우리의 삶 속에서 우러나는 정서, 감정, 미의식이 표출됐다. 또한 민화 책거리에서는 아얌, 반짇고리, 은장도, 비단신 등 여성의 물건들도 심심찮게 등장하고 여인의 자의식을 표현한 그림까지 등장했다.

이렇듯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글로벌한 호소력을 가진 그림으로 전통과 현대를 넘나드는 폭 넓은 스펙트럼을 가진 그림인 책거리의 놀라운 가능성과 미래를 이 책을 통해 만날 수 있다.손민섭 수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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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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