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욱 남서울대 교수·㈔충남도시건축연구원 원장
한동욱 남서울대 교수·㈔충남도시건축연구원 원장
오늘은 우리나라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일이다. 그들을 통해 만들어지는 법이라는 틀에 따라 우리의 사는 모양새도 달라지는 바가 적지 않으니 신중한 선택이 필요할 것이다. 각설하고, 올해 5월 30일 임기를 시작하는 제21대 국회의원들은 그들이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2024년 5월 29일까지는 서울 여의도 서편 푸르스름한 벙거지 모양 지붕의 건물에서 일을 하게 될 것이다. 대한민국 국회의사당이다. 많은 나라들에서 국회의사당은 흔히 민의(民意)의 전당(殿堂)으로 그 나라를 대표하는 상징적 건축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 왕정체제에서 한일병합을 통해 일제식민지 체제로 편입된 우리나라에서 1948년 대한민국정부 수립 이전까지 국회는 매우 낯선 기구였고 따라서 국회의사당이라는 건축물 역시 그 당시에는 그 원형을 생각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첫 제헌국회가 열린 곳은 지금은 철거돼 독립기념관 정원에 일부의 흔적을 남기고 있을 뿐인 중앙청(中央廳)이었다. 중앙청은 옛 조선총독부 청사로 광복 이후 미군정청으로 사용되다 정부 수립 이후 정부 청사로 사용된 건축물로 중앙청이라는 명칭은 캐피탈홀(Capital Hall)을 정인보 선생이 우리식 명칭으로 번역한 것이다. 중앙청은 우리나라에서 건축적으로도 적지 않은 의의를 가진 건축물로 건립 당시 서구의 권위적 건축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돔(dome)을 올린 고전주의적 건축을 원형으로 삼았다. 미국 워싱턴 D.C.의 국회의사당이나 독일 베를린의 국회의사당 등이 그 대표적 원형들이다.

6·25 전쟁 이후 1954년 6월 대한민국 국회의사당은 부민관(俯民館)으로 이전해 소위 `태평로 국회의사당 시대`를 연다. 부민관은 일제 식민지 시절 경성(京城)의 대표적 종합공연장으로 여의도 국회의사당으로 이전한 이후 잠시 공연장으로 다시 사용되다가 현재 서울특별시의회 본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1975년 9월 현재의 `여의도 국회의사당 시대`가 열렸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 남산에서 추진한 국회의사당 신축 이전이 10여 년의 시간이 흐른 후 여의도에서 완성된 것이다. 여의도 국회의사당 설계는 1968년 공모 과정을 거치면서 많은 논란 끝에 결국 선정된 작가들 중 일부의 공동설계로 완성됐다. 지금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지만 설계자 선정과 설계안 확정까지 건축가는 배제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태에서 국회의사당 건축이 이뤄진 것이었다. 건축의 기초가 된 1차 설계안은 돔이 없는 중층(中層) 캐노피(canopy) 지붕에 열주(列柱)가 있는 형식으로 장식이 거의 배제된 열주식 디자인은 그 당시 모더니즘 건축의 어휘로 권위적 건축을 표현하려 할 때 흔히 적용되는 디자인이었다. 그러나 웅장한 느낌이 없다는 국회의 요구로 시공 도중 캐노피에 돔이 얹히게 되었다. 이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요구로 일제 잔재인 중앙청보다 1개 층 높은 6층으로 설계 변경이 이뤄졌다. 기능과 상관없이 제한된 부지 안에서 층수를 높이다 보니 당초 비례를 고려해 계획한 건물의 형태가 더 애매해졌다. 여의도 국회의사당은 돔 아래 로턴다(rotunda)를 중심으로 2개의 대회의장이 있고 그 주변을 부속시설들이 둘러싼 형태다. 외형적으로는 전근대 권위적 건축 어휘들을 현대의 기능적 건축어휘와 이종 결합하고 한국적 전통과 권위를 상징한다고 견강부회하는 것이다. 2013년에는 동아일보와 공간 지(空間 誌)가 선정한 해방 이후 최악의 건물 6위에 선정되기까지 이르렀다. 건축은 시대와 사회의 거울이라는 말을 생각해보면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보며 우리 정치의 현실을 돌아 보지 않을 수 없다. 국회의원 선거일 아침 여의도 국회의사당이 보여주는 패러독스(paradox)를 또다시 보게 되지 않기를 바라며 투표장에 간다.

한동욱(남서울대 교수·㈔충남도시건축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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