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영 충남대 심리학과 교수
전우영 충남대 심리학과 교수
8월의 크리스마스(허진호 감독, 1998)의 사진사 정원(한석규)은 30대 초반의 나이에 죽음을 준비한다. 인생의 8월에 죽음을 맞이하게 된 사진사. 인생의 12월은 그를 기다리고 있지 않다. 그는 사진을 찍는다. 초원사진관에 찾아온 손님들의 사진. 그는 자신의 8월에 찾아온 크리스마스 같은 존재인 다림(심은하)의 환한 얼굴도 사진에 담아둔다. 정원은 자신의 사진도 남긴다. 가족들과의 사진. 죽마고우들과의 단체사진.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영정사진을 남긴다.

우리의 삶은 영원하지 않다. 우리의 인생은 시간과 함께 소멸해간다. 우리 모두의 삶에는 끝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불멸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 세상을 떠나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세상에 계속 남아 있고 싶은 것이다. 움베르또 에코는 사람들이 이런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기억 속에 살아남는 방법을 선택했다고 주장한다. 물리적으로는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는 살아남아서 이 세상에 계속해서 존재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기억해줄 자식에게 평생을 바치고,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남기기 위해서 분투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영원히 살 수는 없지만, 영원히 기억될 수는 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누군가가 할머니를 추억한다면, 그의 마음속에 할머니는 살아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특별한 몇몇의 사람들은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방식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족을 포함해 자신을 기억해주는 몇몇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남는다. 하지만 사람의 기억은 영원하지 않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그에 대한 기억은 시간과 함께 스러져간다. 이 때 사람들의 기억을 붙잡아주는 것이 사진이다. 사진은 기억이다. 사진은 현재의 순간을 붙잡아주고, 그래서 사진 속 인물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살아갈 수 있게 돕는다.

정원도 사진을 찍고 다림도 사진을 찍는다. 둘의 사진은 모두 기억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정원의 사진과 다림의 사진은 다르다. 정원은 사진사고 다림은 불법주차 단속반원이다. 정원의 사진기 앞에 앉은 사람들은 모두 환한 미소를 짓는다. 그들은 이 사진을 통해 누군가에게 자신이 기억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다림의 사진을 통해 자신이 기억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다. 다림이 불법 주차된 차량의 사진을 찍을 때마다 사람들이 거칠게 항의하고 화를 내는 이유다. 우리는 누군가의 마음속에 좋은 모습으로 남아있기를 원한다.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나쁜 모습으로 기억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다. 미움과 증오로 기억된 채 누군가의 마음에 영원히 살아남는다면, 불멸은 가장 큰 처벌이 될지도 모른다.

사진은 사랑이 아니다. 사진은 기억일 뿐이다. 사진은 사랑을 기억하게 할 수도 있지만, 미움을 기억하게 할 수도 있다. 사진이 무엇을 기억하게 할지는 사진속의 인물과 그 사진을 바라보는 사람의 추억이 결정한다. 사랑의 추억은 그 사진을 통해 더 선명하게 사랑을 기억하게 하고, 미움의 추억은 그 사진 때문에 더 선명한 미움의 과거를 떠올리게 만든다. 누군가에게 내 사진이 좋은 기억이 되기 위해서는 선명한 사진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의 좋은 추억이 필요한 것이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면, 그와 좋은 추억을 먼저 만들어놔야 하는 이유다. 사진보다는 사랑이 먼저다.

눈 내린 크리스마스. 정말 오랜만에 초원사진관 앞에 온 다림. 사진관의 쇼윈도에는 지난 8월에 정원이 찍었던 다림의 증명사진이 걸려있다.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다림. 그 사진을 보는 다림도 환해진다. 사진은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도 한다. 내가 지니고 있는 사진은 내가 그 사진 속 인물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는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쇼윈도의 사진이 그렇게 말한다. 정원을 보지 못했어도 다림은 행복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기억해준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 기억해줘서 고마워요.

전우영 충남대 심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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