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민병길 사진전 '질료들의 재배치'

김승환 충북문화재단 대표이사·충북대교수
김승환 충북문화재단 대표이사·충북대교수
민병길은 안개다. 그의 마음도 안개고, 그의 행동도 안개이며, 그의 정신도 안개다. 안개는 그의 붓이기도 하고, 조리개와 렌즈이기도 하며, 그의 심장과 영혼이기도 하다. 대전일보 창간 70주년 기념 전시에서 보여준 그의 작품 대부분은 안개 너머의 사물을 담고 있다. 그래서 40년 그의 사진인생은 안개에 담겨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미 민병길은 안개의 회색 톤을 미묘하게 담아내는 작가로 정평이 있다. 그는 주로 명도만 있는 회색, 흰색, 검정의 세 색상으로 빛의 예술인 사진작업을 한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흑백 색조를 더욱 몽롱하게 연출하여 대담하게 자신의 주제를 전경화시킨다. 그렇다면 민병길의 안개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질료를 표현한다!` 이 말을 번역하면 `안개인 질료(hyle)를 예술인 형상(eidos)으로 표현한다`가 된다. 그러니까 민병길은 경험이 가능한 안개로 경험이 불가능한 내면을 표현하는 것이다. 질료와 형상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인데, 초월적 이데아(idea)의 진리를 추구한 플라톤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적 형상에도 진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현대미학에서 `질료는 내용이고 형상은 형식`이라고 한다면, 그는 질료를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형상을 표현하는 이율배반의 기법을 구사하고 있는 셈이다.

민병길 작품의 이율배반과 아이러니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 기원한 칸트미학에 근거한다. 칸트가 말한 이율배반(antimony)은, `미는 주관적이면서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민병길의 사진에 대입해 보면, 민병길은 자신의 생각을 주관적으로 표현했지만 표현된 작품은 객관적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그 결과 그의 작품은 정교하게 기획한 착오인 아이러니(irony)로 얽힌다. 그런데 그 안개는 수묵담채의 고즈넉한 느낌을 주면서 원근 대신 명암만으로 질료를 형상화하는 경지에 이르러 있다. 그렇다면 민병길은 왜 이런 기법을 썼을까?

그 답 역시 칸트미학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안개, 물, 바람의 몽상적 사진에는 아무런 목적이 없다. 그 목적없음(purposelessness) 자체가 목적이다. 이것을 칸트는 무목적의 목적이라고 하면서 그런 때에만 미적 자유유희가 가능하다고 단언했다. 이런 관념론적 미학이 민병길 사진의 본질이라는 것을 알면 무척 당황스럽다. 그의 작품 어디에도 현실, 역사, 민중, 도덕, 사회, 사상은 보이지 않고, 그의 작품 곳곳에는 몽상, 동경, 망각, 재현, 환상, 망망이 가득하다. 도무지 목적을 찾을 수가 없다. 그래도 실망할 수는 없다. 그것은 민작가가 선택한 미학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민병길은 인생을 위한 예술(art for life`s sake)을 버리고 예술을 위한 예술(art for art`s sake)을 추구하는 것인가? 아니다. 그렇지는 않다. 그는 순수미학으로 현실미학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 의미를 민작가에게 물어보자. `몽상의 안개로 어떻게 현실을 담아내시려는가?` 아마도 민병길은 이렇게 답할 것이다. `질료와 형상, 표현과 재현, 관념과 현실, 이승과 저승, 이성과 감성, 색(色)과 공(空)의 경계는 사라졌고, 나는 탈경계의 지평선을 걷는다.`

김승환 충북문화재단 대표이사· 충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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