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의 슬픔]에리크 뷔야르 지음/ 이재룡 옮김/ 열린책들/ 176쪽/ 1만 2800원

대지의 슬픔
대지의 슬픔
2017년 `그날의 비밀`로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로 꼽히는 공쿠르상을 받은 에리크 뷔야르의 장편 역사소설이다.

뷔야르는 자신의 작품을 `소설(roman)`이라 부르지 않고 `이야기(recit)`라 부르며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작품을 꾸준히 발표해 왔다.

스페인 정복자들을 다룬 `콩키스타도르`(2009), 1차 대전을 다룬 `서쪽의 전투`(2012), 식민지와 노예제를 소재로 한 `콩고`(2012), 서부 개척 시대를 다룬 `대지의 슬픔`(2014), 프랑스 혁명이 배경인 `7월 14일`(2016), 2차 대전 전야를 배경으로 한 `그날의 비밀`(2017), 종교 개혁 당시의 이야기인 `가난한 사람들의 전쟁`(2019) 등이 그것이다.

그의 관심사는 공식 역사의 조명을 받은 주연들보다는 사건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던 무수한 조연들이다. 별로 주목받지 못했던, 얼핏 사소해 보이기까지 하는 사건들을 다루지만 뷔야르 특유의 블랙 유머로 버무린 장면들은 생생하게 살아나 독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이 책은 유명한 총잡이이자 쇼맨이었던 실존 인물, 버펄로 빌을 중심인물로 한 12개 짧은 이야기로 구성돼있다. 빌의 본명은 윌리엄 프레더릭 코디(1846-1917)로 흥행사 존 버크와 함께 만들었던 공연 `와일드 웨스트 쇼`는 진짜 인디언을 출연시켜 당시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

말을 탄 인디언 몇몇이 빌이 가르쳐준 대로 소리를 지르며 레인저들을 둘러싸고 맴돈다. 입에 손바닥을 부딪치며 우, 우, 우, 하는 소리를 낸다. 그것은 비명 소리를 야만적이며 비인간적으로 만든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전쟁의 비명, 이런 소리는 북미 대평원, 캐나다, 아니 그 어떤 곳에서도 내본 적이 없다. 그것은 빌의 `순수한 발명품`이다. 인디언들은 이 연극적 비명, 광대의 기막힌 발명품이 훗날 서양의 모든 아이들이 모닥불을 둘러싸고 맴돌며 `인디언의 외침` 소리를 내고, 입에 손바닥을 두드리란 것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하루에 수 만 명의 관객을 모으고 미국을 넘어 유럽까지 진출했던 이 쇼를 통해 뷔야르는 서부 개척 시대 인디언들의 수난사와 초창기 쇼 비즈니스의 모습을 날카롭게 포착해낸다.

서부 개척 시대의 사건들은 먼 옛날, 먼 나라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느끼기 쉽지만 놀랍게도 와일드 웨스트 쇼 관객들의 모습은 지금의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스펙터클에 환호하고, 진짜 같은 폭력에 열광한다. 소설에서의 스펙터클은 쇼의 현실성이다. 질주하는 말들, 재구성된 전투, 떨어져 죽었다가 다시 일어서는 인디언들. 공연이 끝나면 인디언 수공예품 가게에 들러 기획 상품을 구경한다. 인디언들의 수난에서 파생된 상품을 말이다. 뷔야르는 흔히 리얼리티 쇼는 잔인하고 소비적인 대중오락의 최종 진화형이라고 여겨지지만, 그렇지 않으며 오히려 리얼리티 쇼는 대중오락의 탄생과 함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인디언들만이 쇼 비즈니스라는 거대한 기계에 잡아 먹힌 것은 아니었다. 쇼 비즈니스로 성공한 버펄로 빌 자신조차 그 기계에 소모되고 말았다. 버펄로 빌이라는 인물 자체가 `보여 주기 위한` 마케팅의 산물이었고, 그는 평생 우울증에 시달렸다. 와일드 웨스트 쇼와 버펄로 빌의 이야기는 매일같이 스펙터클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현대의 우리를 되돌아보게 한다. 이 소설도 1890년 운디드니에서 벌어진 인디언 학살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그 사건 자체보다는 현대적 스펙터클의 탄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이 문제에서 고개를 돌리지 못할 것이다. 강은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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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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