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일보 로고

속도의 시대, 한 걸음의 기적

2020-02-19기사 편집 2020-02-19 14:38:38      조수연 기자

대전일보 > 라이프 > 맛있는책

  • 페이스북
  • 구글 플러스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블로그
  • 네이버밴드
  • 핀터레스트
  • 기사URL 복사

[남극으로 걸어간 산책자]엘링 카게 지음/ 김지혜 옮김 / 다른 / 176쪽/ 2만 2000원

"우리는 왜 걷는가? 우리는 어디서부터 걷기 시작해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모두 각자의 답을 가지고 있다. 내가 다른 사람과 나란히 걷는다고 해도 우리는 그 걷기에 대해 완전히 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 신발을 신고 생각이 자유롭게 흐르도록 하고 나면 한 가지는 분명해진다. 한 발을 다른 한 발 앞에 두는 것이 우리가 하는 가장 중요한 행위라는 점이다.-엘링 카게, 본문중"

빠르고 효율적인 것만이 최고의 가치로 여겨지는 속도의 시대. 우리는 가능한 한 자주 그리고 오래 앉아있을 것을 요구받는다. 앉아서 많은 것을 생산하고, 또 소비하도록 세상은 설계돼 왔다. 우리는 더 이상 길을 잃을 기회가 없다. 방황하고 탐험하는 기억에서 멀어진 일상은 가장 쉽고 빠르게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들로 채워진다. 쉽고 빠르게 이룬 성취가 반복되는 삶은 무미건조하다.

'느리게 걷기'처럼 삶을 조금 불편한 것들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는 점을 상기시키는 신간 에세이가 출간됐다. 세계 최초로 아무런 장비 없이 걸어서 지구 3극점(1990년 북극점, 1993년 남극점, 1994년 에베레스트 정상)을 정복한 탐험가 엘링 카게의 '남극으로 걸어간 산책자'다.

저자는 "걸어서 등반하지 않고 차나 헬리콥터 안에 앉아 산 정상에 오르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발밑의 땅을 느끼며 걷기에 온 힘을 쏟고 바람, 냄새, 날씨, 빛의 변화를 경험했을 때 나라는 존재와 내가 발 딛고 선 주변 환경을 보다 실제적이고 세밀하게 규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요구와 속도에서 벗어나 '걷는 존재', '탐험가'로서의 나를 만나는 시간은 200만 년에 거쳐 우리 안에 내재되어 온 본능에 충실한 삶, 그 순수한 기쁨과 완벽한 자유를 만끽할 수 있게 해준다. 가정이나 직장 이상으로 더 많은 것을 아우르는 무언가의 일부가 되는 기적 속에 우리의 생각 역시 속박과 편견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깊이 있는 사색이 가능해진다.

그는 걸어서 이룩한 눈부신 성취를 회고하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 자신의 유년 시절 기억부터 출근길의 계단 오르기, 집 앞 정원 산책 등 일상 걷기의 풍경 속에서 건져 올린 '걷기'의 의미와 가치를 재조명한다. 또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두 다리로 곧게 선 순간부터 그 후예가 달 위에 선명한 발자국을 남기기까지, 우리 모두가 간직하고 있는 '본능'으로써의 '걷기'에 대해 잔잔하고 담백한 어조로 독자들에게 이야기한다. 한 발을 다른 한 발 앞에 두는 이 단순하고도 보편적인 행위에 온 신경을 집중해보자. '지금, 여기' 평범한 일상으로부터 시작되는 한 걸음의 기적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조수연 기자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