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호 원장
안성호 원장
세종시는 이춘희 시장체제 제2기를 맞아 작지만 위대한 풀뿌리민주주의 혁신에 착수했다. 세종시가 추진하는 풀뿌리민주주의 혁신에는 읍·면·동장 시민추천제, 읍·면·동 주민자치회 및 리 마을회의 설치, 읍·면·동 조례·규칙 주민제안 및 주민세율 주민조정, 주민주도 마을계획 수립, 16세 이상 시정참여 확대, 시민주권대학 운영 등이 포함된다.

소련의 반체제작가 알렉산더 솔제니친은 스탈린을 비판한 죄목으로 8년간 감옥과 강제노동수용소에 감금되었다가 풀려나 미국 버몬트 주 카벤디쉬 타운에서 18년간 망명생활을 마치고 러시아로 귀향하기 직전 1994년 12월 타운미팅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6천만 명의 인명을 앗아간 70년 공산주의 지배와 러시아가 그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지금 겪고 있는 빈곤, 인간존엄성 붕괴, 무법, 경제적 혼란의 근원은 뉴잉글랜드 타운미팅 같은 풀뿌리민주주의를 갖지 못한 데 있다."

볼셰비키 혁명의 주모자 레닌은 6년 반 동안 망명객으로 스위스에 체류하는 동안 각 가정마다 총을 소지한 스위스를 공산주의 혁명의 최적지로 간주하고 취리히 사민당에 가입한 후 비밀리에 7명의 노동자를 포섭했다. 그러나 결국 혁명의 꿈을 접고 1917년 러시아로 떠나면서 "스위스 사회가 너무 부르주아적이어서 포기했다"고 토로했다. 레닌이 보기에 "너무 부르주아적인" 스위스 사회는 뉴잉글랜드 타운미팅보다 훨씬 더 강한 풀뿌리민주주의 반석 위에 세워져 있었다.

유럽에서 스탈린(극좌)과 히틀러(극우) 전체주의의 등장원인을 탐구한 ?전체주의의 기원?(1958)을 저술하여 20세기 대표적 정치사상가로 혜성처럼 나타난 한나 아렌트는 "정치의 존재이유는 자유"라고 선언하고, 자유정신이 실천되는 풀뿌리 정치공간으로서 "기초공화국(elementary republic)"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뉴잉글랜드 타운미팅에서 신생미국의 잠재력을 엿본 또 한 명의 사상가는 알렉시스 드 토크빌이다. 1831년 타운미팅을 직접 관찰한 토크빌은 "국민의 힘은 타운십(township)에서 비롯된다. 타운미팅과 자유의 관계는 초등학교와 학문의 관계와 같다. 타운미팅에서 자유는 주민의 손이 닿는 범위에 있다. 타운미팅은 사람들에게 자유를 사용하고 누리는 방법을 가르쳐준다."고 역설했다.

더욱이 풀뿌리민주주의는 사회적 자본 형성과 소득수준 향상에도 기여한다. 이를테면 타운미팅민주주의를 시행하는 뉴잉글랜드 6개 주 중 5개 주가 미국의 `사회적 자본 10대 주`에 포함되고, 뉴잉글랜드가 미국에서 가구당 소득이 가장 높은 지역임이 밝혀졌다. 무엇보다 스위스에 정통한 연구자들은 스위스 번영의 진원지가 평균인구 4천 명의 2,200여 개 코뮌임을 지적해 왔다.

한국의 국격과 민주주의 품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이전투구 정당정글정치를 공동체의 삶을 창조하는 시민공화정치로 전환해야 한다. 인간은 이야기로 실존하는 존재다. 이야기 능력의 상실은 곧 주체성의 상실을 뜻한다. 진정한 정치이야기는 엘리트 정치인의 무용담이 아니라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시민의 결사체험담이다. 시민은 풀뿌리자치공간에서 자유와 공동체를 구체적으로 체험함으로써 구경꾼-군중에서 주권자-시민으로 거듭날 수 있다.

미중 패권경쟁이 가열되고 제국주의 부활을 꿈꾸는 정치세력들이 위협하는 21세기 한반도 정세에서 대한민국의 힘은 풀뿌리민주주의에서 나와야 한다. 한반도를 에워싼 4대 강국과 핵을 보유한 북한이 한국을 얕볼 수 없게 만들고, 한국이 동아시아 평화와 공영을 선도하는 혁신적 포용국가로 우뚝 서는 길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능동적 주권자-시민을 육성하는 풀뿌리민주주의 시민공화정치를 실천하는 것이다.

안성호 (한국행정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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