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10월 28일 매일신보에 실린 `의리적구토` 관련 기사.사진출처=국립중앙도서관 신문 아카이브 출처
1919년 10월 28일 매일신보에 실린 `의리적구토` 관련 기사.사진출처=국립중앙도서관 신문 아카이브 출처
1919년 10월 27일은 대한민국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날이다. 김도산 감독의 ‘의리적 구토’라는 첫 한국영화가 만들어져 단성사에서 상영된 것. 이에 1966년부터 정부와 영화인들은 이 날을 ‘영화의 날’로 지정해 기념하고 있다.

하지만 학자들 사이에서는 첫 영화의 기준과 관점에 따라 ‘의리적 구토’를 첫 영화로 봐야하는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의리적 구토’는 완전한 극영화가 아닌 연쇄극이기 때문이다. 연쇄극이란 연극 무대 위에서의 실연과 스크린 영사가 결합된 형식의 공연으로, 극적인 요소와 줄거리를 갖춘 오늘날의 극영화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다.

따라서 최초 극영화로 통용되는 ‘월하의 맹세’를 첫 한국영화로 봐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이 영화는 조선총독부 체신국의 저축 장려 선전영화로 일본에서 유학을 다녀온 윤백남이 각본을 짜고 감독까지 맡아 1923년 4월 9일 개봉했다.

남자주인공이 주색에 빠져 빚에 허덕이게 되자 그의 약혼녀 아버지가 저축해둔 돈으로 빚을 청산하고 두 남녀는 앞으로 성실히 저축할 것을 다짐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알려진 내용과는 다르게 ‘월하의 맹세’보다 3개월이나 앞선 극영화가 있다. ‘의리적 구토’에서 감독을 맡았던 김도산 감독이 연쇄극 형식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만든 극영화 ‘국경’이다.

일각에선 ‘국경’이 개봉시기도 앞설뿐더러 선전용이 아닌 상업용으로 제작됐단 점에서 최초 한국영화로 봐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한국인 감독·배우가 출연하지만 일본 영화사인 쇼치쿠(松竹)사가 제작 및 촬영을 한 것으로 당시 조선의 피지배적인 시대 상황을 그려내 한국인들의 구미에 맞춘 영화로 알려져 있다.

앞서 소개된 영화는 한국인이 최초로 감독을 맡아 한국 영화 예술을 활성화시켰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지만 일본의 자본과 기술이 들어가 있어 씁쓸한 인상을 남긴다.

이에 민족자본과 기술이 들어갔으며 단성사가 직접 영화제작을 한 ‘장화홍련전’이 진정한 첫 한국영화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1928년 9월에 개봉한 이 영화는 한국영화사 최초로 전 출연진과 스태프들이 한국인으로 이뤄져있어 의미를 가진다.

고전소설을 김영환 작가가 각색하고 박정현 감독이 연출한 것으로 1936년, 1956년 다시 제작될 정도로 큰 흥행을 이뤘다. 한국 영화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다양한 작품이 ‘첫 한국영화’라는 타이틀을 두고 의견을 달리하고 있지만 언급된 작품들 모두 당시의 시대와 생활을 담아낸 역사적 가치가 있는 예술품이란 사실엔 변함이 없다.

일제강점기에 놓여있던 한국 영화 산업은 그후 100년 동안 항일 메시지를 담은 저항영화, 전쟁 후 부흥기, 1970년대 침체기 등을 거치며 다양한 변화와 발전을 거듭해 왔다.

어떤 작품이 첫 영화로 불리든 전국의 영화인들은 지금도 2시간여의 짧은 영상 속에 끊임없이 변모하는 시대의 모습을 담아내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중이다. 이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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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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