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아 시인
박세아 시인
69년 충북 영동에서 태어나 어릴 적 고열로 인해 뇌성마비 장애인이 됐다. 아버지는 나를 낳자마자 병으로 돌아가셨다. 엄마는 다섯 살 때 읍내로 돈을 벌기 위해 가셨다. 엄마도 아빠도 없는 곳에서 걷지도 못하는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됐다. 어느 날 조그마한 방에서 창문을 바라보며 나도 일어나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나는 일어날꺼야"를 수없이 외치며 일어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흔들리는 몸으로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매일 매일 넘어져서 무릎에서 피가 마를 날이 없었고, 넘어지면 또 일어나고 넘어지면 다시 일어났다. 우리가 어릴 적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안 좋을 때는,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애들이 놀리고 때리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짐승처럼 바라보곤 했다. 아저씨들이 나를 바라보면 나도 똑같이 보면서 "다 바라보셨나요. 다 봤으면 가도 되죠?"하면서 가기도 했다.

나에겐 모든 것이 도전 이었다. 고등학교 가는 것도 어려웠다. 간신히 인문계 충북 영동고등학교를 들어갔다. 그러나 대학이 문제였다. 체력장은 하지도 못하고 20점을 포기해야 만했다. 삼수까지 해서 신학대학에 원서를 냈고, 대학 관계자들은 난리가 났다. 온전한 것을 하나님께 바쳐야 되는데 말도 잘못하고 몸은 뒤틀어진 장애인은 목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장님의 선택으로 합격을 해서 한성신학교를 졸업했다. 그러나 신학대학원 시험을 받는데 처음에는 이런 사람은 말도 못하기 때문에 설교를 할 수 없다고 해서 떨어트렸다. 우리 교회 담임목사의 항의로 다음 해에 침레신학대학원에 입학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목원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석사를 하고 한남대학교에서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그리고 대한민국 뇌성마비장애인 1호 목사와 시인이 되었다. 지금은 장애인공동생활가정의 시설장으로 민간단체의 대표로 장애인 문화 복지 사역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나에게 미래는 보이지 않았고, 선명하지 않았다. 그저 현실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찾았다. 장애와 고통이 앞길을 가로 막았다. 편견과 뒤틀리는 몸, 찌그러지는 얼굴로 말을 어눌하게 하는 장애인으로 사회와 맞서야 했다. 지금도 힘들고, 조금 실수를 해도 계속해서 괴롭게 하는 것들이 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외친다. "나는 할 수 있어 나는 행복하다."하면서 믿음의 마음으로 보이지 않는 실상이지만 행복하고 즐겁게 용기를 내본다. 내가 먼저 걸어 온 길이 나처럼 어려운 사람들이 걸어오는 길에 힘이 되길 바란다.박세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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