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에서 조각을 전공한 내가 `작가`가 아닌 `큐레이터`가 된 연유는 몇 가지 있다. 그 중 하나는 석사과정 중 읽었던 한 권의 책 때문이다. 독일 출신의 미국 미술사학자 에르빈 파노프스키의 저서 `시각예술의 의미 Meaning in the Visual Art(1955)`가 그것이다. 20여 년 전인 당시 나는 국내에는 번역되지 않아 문고판형 펭귄북스로 출간된 원서를 친구들과 나눠가며 함께 읽었다. 파노프스키는 독일 함부르크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하다가 1933년 나치의 유대인 공직 추방 때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가 확립한 미술사 연구방법론인 도상해석학(圖像解釋學)은 양식사적 미술사가 대부분이던 국내 학계에 갓 소개돼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연구방법론이었다.
이 책이 `예술`을 중심에 두고 일하는 지금의 내 직업으로 이끈 것은 사실 서장의 첫 대목이었다. 파노프스키는, 철학자 칸트가 죽기 아흐레 전 자신의 마음의 친구였던 주치의를 정중하게 맞이하는 모습을 적고 있다. 연로한 데다 위중해 몸을 가눌 수조차 없는 칸트가 자신을 찾아 온 친구를 맞아하기 위해 가까스로 일어난 후 의사가 자리에 앉자 그제야 자신도 도움을 받아 의자에 앉는 장면을 인용한다. 잠시 후 기운을 되찾은 칸트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성(Humanity)에 대한 감각은 아직도 나를 떠나지 않았소." 칸트와 의사 모두 눈물을 흘리며 감동했음으로 인용을 마감하는 파노프스키가 저서 `시각예술의 의미`를 시작하는 이유에 나는 깊이 공감했다. 병마와 노쇠,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죽음 등 불균형적 상황을 초래할 그 모든 것에도 굴복되지 않은 채 타자(친구)를 섬기기 위해 자신의 `인간성`을 일깨우려 애쓴다는 것은 시각예술의 본질이자 의미이다.
미술관의 수집, 조사연구, 교육, 전시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관람자들이 만날 수 있는 `예술`들은 칸트가 끝끝내 지켜내려 했던 `인간성`, 즉 `인간다움`을 어떠한 방식으로 지켜내고 있을까.
난 늘상 내 직업 `큐레이터`의 애로를 정신노동 강도의 적지 않은 크기를 이유로 말하곤 한다. 18세기 `감성적 인식의 과학`이라는 학명으로 시작된 미학과 미학의 대상인 예술은 결코 감성이나 인식(이성) 그 한쪽만으로는 의미를 얻기 어렵다. 폭염이나 난폭한 세태로 인간다움을 지키지 못하고 포기하기 쉬운 요즘이다. 미술현장에서 십수년을 직업인으로 살았지만, 그 어떤 것도 불균형적이지 않는 `인간성`, 즉 `인간다움`을 본질로 삼는 예술과 예술활동을 발견하고 세운다는 일이 아직도 쉽지 않다. 지루하고 어려울지라도 관람자들이 그 의미를 알아차리게 하는 것도 역시 어려운 일이다.
김주원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