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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기고] 인도적인 관점으로 난민문제를 바라보자

2019-07-09기사 편집 2019-07-09 09: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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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사진1박미애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대전지역본부장

얼마 전 전국 각 출입국과 외국인청에 안내문이 붙었다. 7월1일부터 '난민신청자와 인도적 체류자는 건설업에 취업할 수 없고, 사전 허가를 받고 취업해야 하고, 난민 인정자와 신청자, 인도적 체류자들이 체류기간을 연장하고 취업 활동 허가를 받을 때 추가 수수료를 내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이로 인해 건설현장에서 일하던 국내 난민신청자와 인도적 체류자들이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었다. 법무부가 지난 1일부터 '난민신청자와 인도적 체류자 건설업 취업 불가' 내부지침을 시행하면서다. 지침의 법적 근거와 실효성을 놓고 지적이 나오는 가운데 당사자인 난민과 이주민·난민인권단체들은 지침 철회를 촉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해 대한민국은 제주도에 입국한 예멘인 519명의 난민신청으로 난민수용 찬반문제가 뜨거운 이슈가 되었었다. 난민은 인종, 종교 또는 정치적, 사상적 차이로 인한 박해를 피해 외국으로 탈출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우리나라는 일제 해방이전까지 독립운동가 들이 망명길에 나섰다. 1900년대 초에는 국경을 넘기 쉬워 만주, 연해주, 상해 지역에 도착해 독립투쟁을 목적으로 정착하는 경우가 많았다. 몽골의 슈바이처 이태준 열사 또한 한국의 정치 난민이었다. 해방 직후에는 제주도 4.3 사건으로 인한 난민이 발생하여 제주도민이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고, 한국전쟁 당시에도 대규모 난민이 발생하여 전쟁을 피해 많은 사람들이 가까운 일본이나 우방국인 미국 또는 제 3국을 택해 유럽으로 들어갔다. 그중 현재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 노르웨이의 라면왕으로 알려진 이철호 선생. 군사 독재 시기에 정치적 망명을 떠나 난민으로 인정받은 이들도 많다. 이런 사례로 가장 유명한 인물이 홍세화 선생이다. 또한 5.18 민주화운동의 최후의 수배자로 알려져 있던 윤한봉 선생도 1981년에 장장 35일 동안 화물선에 숨어서 미국으로 밀항, 망명에 성공했다. 또한 김대중 전 대통령도 1970년대 당시 10월 유신을 피해 두 차례 미국으로 망명한 바 있다. 2017년 현재에도 한국 출신 난민은 꾸준히 발생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 6월 헌법재판소가 양심적 병역 거부자에 대한 대체복무제를 규정하지 않은 현행 병역법에 대한 헌법불합치 판정이 내려지기 전까지만 해도 양심적 병역거부가 허용되지 않고, 군대에서 동성애자들이 인권을 존중받지 못하기에 젊은 남성의 최후의 선택지가 망명이었다. 유엔난민기구(UNHCR)의 통계에 따르면 2016년 한 해 발생한 한국 출신 난민은 243명이다.

필자는 이번 법무부의 결정과 제주 예멘인 난민 사태를 보며 떠오르는 사건이 있다. 바로 1923년 일본을 뒤흔든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사건이다. 조선인들이 대지진의 혼란을 틈타 도둑질을 일삼고, 일본여성들을 강간한다는 유언비어가 떠돌았고, 공포를 느낀 일본인들은 자경단을 조직해 조선인들을 죽창으로 무참히 죽였다. 무한경쟁에 내몰린 한국사회의 현실 속에 작은 계기만 있어도 깊은 상처를 받는 구조가 되어 버린 것 같다. 공포가 지배자로 등장하는 일! 이슬람 난민은 그 원인으로 누명 씌우기 딱 알맞은 무기력한 대상이 아닌가 싶다.

식민지, 전쟁, 가난과 같은 과거 국가의 위기가 있을 때마다 우리는 전 세계인의 희생과 도움이 있었기에 현재의 경제대국을 이룰 수 있었다. 한국사회의 혼란과 난민에 대한 정부 정책 미흡, 또 이슬람 문화 및 대규모 난민을 받아들일 국민들의 마음에 준비가 되지 않았기에 일어난 현상이라 생각된다. 일어나지도 않은 막연한 공포에 사로잡히지 말고, 과거를 돌아보고 인도적 관점으로 난민을 바라보며 경제대국에 맞는 포용적인 난민대책이 수립되길 바란다. 박미애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대전지역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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