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이 우리의 삶을 명상할 수 있게 하고, 심지어는 삶의 본질을 끌어낼 수 있다고 본 디드로(Denis Didrot, 1713-1784)와 같은 시대를 살아간 사람 중에 버크(Edmund Burke, 1729-1797)가 있다. 버크는 디드로와는 다르게 계몽주의 철학에 심한 혐오를 가진 사람이었지만, 기존 미술에 대해 비판적인 대안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버크는 특히나 형식적인 부분, 즉 그리스에서 유래한 비례와 조화를 중시한 기존 미술을 반대했다.

버크는 미술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이 측정에 속하는 관념이 아니라고 말하며, 그렇기에 비례에 대한 계산이나 기하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실제로 측정이란 이성을 통해 이뤄지는 작업인데,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꼭 이성만의 작업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근사값이 1:1.618인 무리수를 지칭하는 황금비율이나, 규칙성과 균제, 비례가 미의 핵심이라는 비트루비우스(Marcus Vitruvius Pollio, BC80 또는 70-BC15)의 견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아름다움이 조화나 적합성의 문제라는 견해도 비판한다. 목적에 부응하는 것이 미 자체라는 의견을 거부한 것이다. 그는 "원추형으로 튀어나오고 끝이 딱딱한 각질로 둘러싸인 코와 음푹 파인 눈 등 돼지 얼굴의 모든 형상은 땅을 파거나 먹을 것을 집어내는 일에 매우 적합하므로 그것은 대단히 아름다울 것이다"라고 반어적으로 조화와 적합성을 비판했다.

그렇다면 버크는 어떤 대안을 제시했을까? 그가 제시한 대안은 크게 두 가지다. 우선 아름다움이 수학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다양하고, 그래서 `아름다움`이 아니라 `아름다움들`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미술을 보는 관점을 다양화해 표현의 영역을 확장시켜 줬다. 다음으로 아름다움을 만드는 성질은 비례가 아니라 부드러움이므로, 비교적 크기가 작고, 표면이 매끄럽고, 선들이 사방으로 퍼지고, 부분들은 모난 곳이 없으며 서로 융해돼 있고, 섬세한 구조를 가지며, 너무 짙거나 눈부시지 않으면서 선명하고 밝은 색을 갖는 등의 감각적으로 경험되는 성질들을 강조했다.

사실 이 두 번째 대안을 비롯한 일부 주장은 현대미술의 관점에서 보면 의심스러운 것이 있지만, 어쨌든 버크는 당대의 미술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려 노력했고, 미술에 대한 생각이 바뀌는 데 일조했다. 그리고 여기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숭고`라는 개념을 비롯해 더욱 다양한 주장을 했고, 이러한 것들은 의미 있는 생각의 지점들에 위치한다. 아무튼 버크 이후 미술은 형식적인 부분에서 조금 자유로워졌다.

이주형 한남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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