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의 불교문화재를 접하게 되면 왜 이토록 많은 부처와 나한(羅漢, 깨달음을 얻은 이), 보살, 역사(力士)들이 얽혀서 거대한 세계를 반복적으로 증명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깨달음을 얻은 부처의 뒤에서 수 만세계의 인연을 증명하듯 그들은 반복적이고 압도적으로 표현되어 있어서 때론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게 된다. 천불(千佛)이 대표적이다. 부처가 많은 것은 구제할 중생이 차고 넘친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 권위를 파괴한 `보통부처`들이 우리와 함께 하는 대중부처의 시대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자기 안의 부처를 보는 것이 `광명`이고 그러한 빛으로 세상을 밝게 하는 것이 천불신앙임을 생각해 볼 때 보통 사람의 위대한 시대는 이미 와 있다.

천불과 관련해 기억에 남는 사찰로 미황사와 대흥사, 그리고 마곡사가 있다. 미황사는 대웅보전 위쪽의 나무부재와 흙벽에 부처를 그린 종이화폭을 붙여 천불을 그렸고 대흥사는 경주의 불석산(佛石山)의 옥돌을 쪼아 조성했다. 마곡사는 석가모니의 과거칠불과 함께 천불을 모셔 놓았다. 천불과 관련해서 흥미로운 일화로는 대흥사 1천불 중 768좌 부처님은 1817년 일본 나가사끼까지 표류해갔다가 어렵사리 돌아온 기록이 있다.

1811년 (순조11년) 2월 가리포 첨사가 절 창고에 보관된 군용미 등을 점검하면서 부주의로 햇불의 불씨를 떨어뜨리는 바람에 대둔사에 큰 화재가 일어나 하루 아침 사이에 유서깊은 건물 9채가 하룻밤 사이에 불타 버렸다. 이듬해부터 완호(玩虎) 스님이 화주(化主)가 되어 중창 불사가 시작됐다. 1817년에는 천불전에 모실 부처님을 경주 기림사에서 불석산의 옥석을 쪼아 1000달러로 조성했다, 각처에서 불러온 화원 43명과 막대한 비용이 투입된 대역사였다. 성대한 점안 법회를 마친 후 천불을 해남 대둔사까지 운송하는 것은 배편을 이용했다. 1817년 11월 16일 경주 기림사에서 소달구지에 천불을 싣고 경주 장진포로 향했다. 11월 23일 울산 장생포에서 작은 배에 불상 232위를, 큰 배에 불상 768위를 싣고 해남을 향했다. 두 배는 11월 25일 동래로 향하다 심한 바람과 기상변화를 만나 작은 배는 동래항으로 들어가지만 큰 배는 3일간 표류해 일본 규슈 나가사키항에 머물다 7개월 만에 귀국했다.

1818년 8월 11일 불상이 일본에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다산 정약용은 완호(玩虎) 선사에게 편지를 보내 `일본에 갔다 온 768여구의 불상에 `日` 표시를 했으면 좋겠다`는 편지를 보낸다. 대흥사 천불전의 부처 중 일본에서 돌아온 부처의 등 뒤에 지금도 날일(日)자가 선명히 적혀 있다. 2000년 중반 월전미술관의 소장품을 정리하던 중 대흥사 천불에 관한 다산(茶山)의 편지에 `어느 것이 먼저 온 300개의 부처이고 어느 것이 동쪽으로 떠 내려갔던 700개의 부처인 줄 알겠습니까?` 라는 구절을 이해하지 못하다가 사건의 전말을 정민 교수의 도움을 얻어 겨우 이해했다. 일본화가 우키다 잇케이(浮田一蕙)가 그린 `조선표객도(朝鮮漂客圖)`와 완호선사 열전 등을 통해서이다.

불상 하나를 만드는 것에도 엄청남 원력(願力)이 필요하다. 천불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곳에 부처가 있고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 의미이다. 내가 본 미황사와 마곡사의 천불은 모두 각기 다른 얼굴을 한 부처들이었다. 동일한 반복이 아닌 개개인 모두가 다른 천개의 부처, 천개의 원력이 시공을 통해 얽혀있고 현재의 얼굴을 반추하고 있다. 현대의 조각과 미술은 천불을 통해 천편일률을 넘어선 새로운 배움을 얻을 수 있다.

류철하(미술비평가)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