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쪽에 위치한 쌩떼밀리옹과 인접한 뽀므롤의 핵심 지역에는 언덕 위 포도밭 사이로 구별하기도 힘든 작은 길들이 무질서하게 엉켜 있는 듯합니다. 포도원 사이에 담장이나 울타리도 없어서, 샤또 페트뤼스 포도밭 통로를 자동차로 가로 질러 가다보니 1킬로쯤 떨어진 샤또 라 꽁세이앙뜨(La Conseillante) 주차장으로 나와지더군요.

페트뤼스 주변 샤또들은 검은 점토가 자갈과 모래가 함께 섞여 있어 배수가 잘 되고, 토양 속에 산화철 성분이 주변의 미세 기후와 잘 어우러져 포므롤 특유의 와인을 만듭니다. 샤또 레방질(l`Evangile)에서는 길쭉한 원통에 포도밭의 지층을 그대로 옮겨서 방문객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카톨릭의 영향을 받아, 샤또 이름으로 명명된 에방질은 `복음(evangel)`을 의미합니다. 중세 시대 유럽에서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까지 가는 성지 순례길의 중간 기착지였던 이 지역에 십자군 기사단이 숙소와 병원 등을 세우고 포도를 재배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페트뤼스 바로 옆의 샤또 호산나(Hosanna)와 쌩떼밀리옹의 샤또 앙젤뤼스(Angelus, 삼종기도)도 비슷한 사례로 판단됩니다.

1741년에 설립된 에방질은 오메독의 뽀이약 1등급 샤또 라피트(Lafite)를 소유한 도멘 바롱 드 로칠드(Domaines Barons de Rothschild)가 1990년에 인수하며, 포도원 개선을 위한 와이너리의 노력이 투영됐습니다. 우선 에방질의 예전 명성에 걸맞게 품질을 높이고자 엄격한 선별의 목적으로, 세컨 와인 블라종 드 레방질(Blason de l`Evangile)을 출시합니다.

1998년에 대대적인 포도원 설비 개선을 시작하여, 2004년 지하에 발효조와 숙성실의 개보수로 건물의 새로운 구성을 완료합니다. 구획된 포도밭 별로 1차 발효를 진행하는 20개의 현대식 시멘트 탱크는 항온에 적합하며 전자식으로 자동 관리합니다. 원형의 오크통 숙성고에서는 70% 비율의 새로운 오크통에 평균 18개월간 2차 발효가 진행됩니다. 로칠드의 노하우가 곳곳에 적용되었기에, 에방질은 `포므롤의 라피트`라 칭해지기도 합니다.

뽀므롤 샤또로서는 비교적 큰 규모인 에방질의 22 헥타의 포도밭에눈 와인의 과일 풍미와 바디감과 유연함에 기여하는 메를로 80%와 섬세함과 구조감을 선사하는 카베르네 프랑 20%가 재배됩니다. 2016년 7월 13일 시음실에서, 잘 숙성된 레드 와인색에 가까운 예쁜 빨간색 머리 염색의, 한국 드라마를 좋아해서 한국어를 배우는 중이라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한 여성 가이드가 준비한 와인은 놀랍게도 몇 주 전에 병입한 2015년 샘플(echantillon)이었습니다.

오메독 와인이었으면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시음이 메를로 위주의 뽀므롤이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에방질 2015는 메를로 84%와 카베르네 프랑 16%가 블렌딩 되었는데, 숙성 1년도 채 되지 않았음에도 최근의 가장 뛰어난 빈티지로 평가받아 풍만하고 관능적일 2015년 뽀므롤 와인의 향후 모습을 예상하는데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에방질은 북쪽으로는 뽀므롤 최고의 샤또 페트뤼스와 인접하고, 남쪽으로는 도로 하나 건너 쌩떼밀리옹 1등급 A 샤또 슈발블랑(Cheval Blanc)의 포도원과 맞닿은 위치에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높은 인기로 인해 지나 친 고가의 와인인 페트뤼스와 슈발블랑의 맛을 비슷한 떼루아의 에방질을 통해 엿볼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신성식 ETRI 미래전략연구소 산업전략연구그룹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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