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우리말의 탄생

최경봉 지음/책과함께/ 376쪽/1만6500원

1945년 9월 8일 경성역 조선통운 창고. 수취인이 조선총독부 고등법원으로 돼 있는 화물이 역장에 의해 발견됐다. 이 화물안에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제에 압수됐다가 해방의 혼란 속에서 사라졌던, 원고지 2만 6500여 장 분량의 우리말 사전 원고가 들어있었다. 일본 경찰에 압수당한지 3년만에 조선어학회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최근 1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말모이`의 소재가 된 최초의 국어사전 조선말큰사전이 만들어진 과정이 담긴 `우리말 탄생`이 최신 연구 성과를 더해 재출간됐다.

저자 최경봉 원광대 국문과 교수는 이 책에 우리말 사전(조선말큰사전)이 만들어지기까지 50년 동안의 길고 험난했던 전 과정을 집중 조명한다. 저자가 직접 발로 뛰어 얻은 수많은 자료와 사진을 토대로 우리말 사전은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는지, 어떤 사람들이 만들었는지, 일제의 탄압이 한창이던 시기에 그들은 왜 목숨까지 걸어가며 사전을 편찬하려 했는지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특히 사전 편찬을 위해 인생을 바친 사람들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사실은 다시한번 감동을 자아나게 한다. 국문 정리의 방향을 잡는 데 선구적 역할을 한 이봉운과 지석영, 근대 국어학의 대부 주시경, 직접 사전을 편찬했던 조선어 교사 심의린, 사전 편찬사업에 뛰어든 식민지 지식인들의 모임인 광문회와 계명구락부 사람들 까지. 비록 완성된 형태의 사전이라는 결과물을 내놓지는 못했지만 우리말 사전의 기초를 위해 평생을 다 바친 사람들이다. 이들의 노력을 밑받침 삼아 사전 편찬을 하려던 김두봉, 평생 모은 사전 원고를 조선어학회에 기증한 이상춘, 수양동우회와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초토화된 조선어학회의 추락을 지켜보기 힘들어 자살한 신명균 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만큼 많은 사람들이 우리말 사전 하나에 자신의 모든것을 다 걸었다. 그들에게 사전 편찬은 힘들게 캐낸 원석을 가공하여 아름다운 보석으로 만드는 것과 같은 작업이었을터.

또 책에 담은 모든 사연은 나라 없는 민족의 언어를 사전에 담는 작업이 얼마나 지난했는지 웅변한다. 조선어학회 간부들이 우리말 사전 출판 허가를 받아내기 위해 신궁 참배라는 치욕을 무릅써야 했던 것이 대표적이다.

이 세상에는 수천 개의 언어가 존재한다. 하지만 같은 언어를 쓰는 언어공동체들 중 자신들의 언어로 만든 `사전`을 가지고 있는 경우는 극히 일부다. 사전을 가지고 있더라도 서로 다른 언어들을 대응시켜서 만든 대역사전(한영사전, 영한사전 등)에만 기록되어 있는 언어가 대부분이다. 대한민국은 모국어인 `한글`로 만들어진 우리말 사전을 가지고 있는 언어공동체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말과 글의 기준 역할을 하는 사전이 어떤 의도와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것인지에 대해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 책은 이러한 인식에 경종을 울린다.

원세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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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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