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량형은 원래 길이, 부피, 무게를 재는 방법이나 기구를 일컫는 단어지만, 측정에서 사용할 모든 단위 체계를 폭넓게 가리키곤 한다. 같은 도량형을 사용하자는 약속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꼭 필요하다. 같은 언어를 쓰는 이웃 지역이라도 서로 다른 길이와 무게 단위를 사용한다면 낯선 외국처럼 느낄 것이다.

현재 대부분의 나라는 `미터법`이라고 불리는 국제단위계(SI)를 도량형 표준으로 사용하고 있다. 미터법은 1790년 프랑스에서 입안된 후 1875년 17개국이 체결한 국제조약인 `미터협약`을 통해 국제표준으로 채택됐다. 우리나라는 대한제국 시절인 1905년 미터법을 일부 도입하기도 했지만 미터협약에 공식 가입한 시점은 1959년이다.

미터법 이전에는 각 지방마다 각기 다른 도량형을 사용했지만 대개 정치경제적으로 영향력이 큰 나라의 단위가 통용됐다. 힘과 권위가 지배하는 국제사회에서 어떤 언어, 어떤 화폐, 어떤 도량형을 사용하는 것이 외교와 교역에 유리할 지를 생각해보면 당연한 결과이다. 이런 배경에서 18세기 프랑스 혁명의 결과로 탄생한 미터법은 `도량형 혁명`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왜 혁명이라고까지 부를까?

미터법은 권력자의 지시가 아닌 시민들의 요구로 제정됐다. 그때까지 도량형은 권력이 결정하는 정복과 통치의 권위를 드러내는 상징이었다. 반면, 프랑스 혁명 이후 새로운 시대를 연 시민계급은 도량형이 달라서 생기는 문제를 피부로 느끼고 있었으므로 당시 국민의회를 통해 새로운 도량형 제정과 통일을 요구하게 됐다.

시민의 요구로 추진된 새로운 미터법은 권력의 흥망성쇠와 무관한 보편적이고 영속적인 단위 정의를 추구했고 그 임무는 과학자들에게 맡겨졌다. 과학자들은 권력자의 신체부위를 기준으로 정하던 길이의 단위를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지구의 둘레를 기준으로 하도록 바꿨다. 새로운 정의는 보편적인 원리와 검증 가능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했으므로 여러 국가들의 합의로 이어질 수 있었다. 도량형은 이제 더 이상 한 국가가 단독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국제기구를 통해 협의해야 하는 의제가 됐다.

미터법 제정 이후에도 도량형 혁명은 끝나지 않았다. 과학자들은 첨단 기술의 발전을 위해 더 높은 수준의 보편성과 영속성을 가진 단위 정의가 필요했다. 또한, 단위의 기준이 되는 물질인 `원기(原器)`를 정해 두고 이를 각 지역으로 전달하는 단위 보급 방식을 개선하고자 했다. 원기가 손상되거나 변화하면 단위 정확도에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원기를 가진 나라나 기관이 일종의 권위를 가지게 되어 도량형 `혁명정신`에도 맞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도량형 기본단위에 원기가 사라지도록 국제단위계를 여러 차례 개정해 왔다.

2018년 11월 16일, 1790년부터 시작된 도량형 혁명의 긴 여정이 드디어 마침표를 찍었다. 이날 미터협약 회원국들은 유일하게 남아있던 킬로그램 원기를 폐기하고 질량, 전류, 온도, 물질량 등 모든 기본단위를 자연상수와 물리법칙에 기반해 새롭게 정의하기로 의결했다. 과학자들은 이제 지구에서 통용되는 도량형 단위를 먼 훗날 화성에 가서 살면서도 똑같이 재현할 수 있는 높은 수준의 보편성과 영속성을 확보하게 됐다고 믿는다.

빛이 있다면 그림자도 있는 법. 도량형 혁명으로 원기가 모두 사라지자 정작 단위를 사용하는 시민들은 그 배경이나 원리를 이해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미터의 정의를 이해하려면 레이저 원리를 배워야 하고, 초의 정의는 원자물리의 영역이다. 킬로그램 정의는 광학부터 양자역학까지 다양한 분야의 전문 지식이 있어야 제대로 알 수 있다. 도량형 혁명이 성공적으로 정착되기 위해서는 이제 과학자들이 새로운 임무에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다. 전문가 집단과 일반 시민의 간극을 좁히고 과학이 시민의 상식 영역에 녹아들 수 있도록 하는 지식 나눔과 소통의 임무 말이다.

이동훈 한국표준과학연구원 광학표준센터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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