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만한 서양의 대가들, 그 가운데서도 20세기 초반기 인상주의 언저리의 작가들이 거의 우리나라에 직접 소개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진데, 여기에서 유독 세잔(Paul Cezanne)의 그림들이 빠져 있다. 그것은 마네, 모네, 드가, 르누아르, 반 고흐 등이 이유가 어찌되었든간에 세간의 애호를 받고 있는 반면, 세잔의 그림들은 보는 이에게 호오(好惡)의 취미판단에 앞선 고민을 안겨 주기 때문일 것이다. 지각에 대한 실험으로부터 출발했지만 결과적으로 서정성에 도달했던 인상주의자들의 그것에 비해, 세잔의 그림들은 화가 자신이 화폭 위에 담았던 수많은 고민들의 집적인 것처럼 쉽게 풀리지 않는 문제를 안고 있어 보는 이를 혼란케 한다.

세잔의 경우에는, 가까운 지인들의 인물화 등도 있지만 특히 풍경화를 많이 남겼고 고향인 액상프로방스의 생 빅투아르 산(山)의 그의 영원한 테마였다. 보통의 경우 풍경화는 바라보는 이에게 있어서 복잡한 마음을 내려놓고 쉴 수 있게 하는 소재인데, 세잔의 경우는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복잡한 기분이 사로잡히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한 그의 그림을 앞에 두고 예민한 후배 화가들 역시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고민에 휩싸였을 것이며, 그의 그림이 담고 있는 많은 문제들, 시점의 문제, 색채와 공간의 문제 등을 어느 각도에서 받아 안느냐에 따라 새로운 사조의 발생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고, 그것이 세잔을 현대미술의 아버지라 칭하게 하는 점일 것이다. 우리나라 미술계를 휩쓸고 있는 인상주의 블록버스터 전시의 홍수 가운데서도 아직 본격적으로 소개되고 있지 않으나, 세잔의 작품을 잘 들여다 보는 것은 현대미술 전반의 이해를 위해 꼭 필요한 일로 여겨진다.

그에게 있어서 생 빅투아르산은 `사랑하는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풍경에는 세잔이 탐구했던 모든 요소들, 입체감과 색채, 기하학적 아름다움 등이 하나의 자연으로 집대성되어 있다. 어쨌거나 세잔은 동요하는 색채와 여러 겹의 윤곽선으로 풍경을 나타내고자 했다. 그는 단 하나의 윤곽선이라는 관습을 포기했고, 원근법을 비껴갔다. 아마도 그는 자연을 자신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시종일관 `본다`는 행위의 불확실성을 직면했던 것으로 보인다. 매우 추상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실현을 위한 노력은, 자신이 가진 모든 회화적 테크닉을 풍경에 집중하게 만들었고, 그의 풍경화는 그가 감각기관인 눈으로 본 것과 그것을 머리로 받아들여 변형시키는 형태로 드러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저런 정보들을 가지고 생각하더라도, 그의 풍경화는 여전히 어렵다. 세잔의 풍경화가 관객에게 주는 미덕은, 아름다움에 대한 찬탄이 아니라 답이 보이지 않는 고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는 왜 바람에 흔들리는 이젤을 붙들며 생 빅투아르 산을 그리고자 했을까. 왜 날렵한 붓질로 산과 나무를 매끈하게 그리지 않고 떨리는 색면으로 표현하여, 보는 이를 고민하게 하는 것일까. 왜 그의 풍경은 풍경임을 인지함에도 불구하고 끝내 떨쳐지지 않는 의문을 남기게 되는 것일까. 이런 갖가지의 생각을 하게 하는 것, 그것이 세잔의 풍경화가 가진 독특함이고, 어쩌면 그것마저 현대미술의 시작을 알리는 특성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윤희 청주시립미술관 학예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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