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이 글의 제목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 궁금하다. 내 나이 또래라면 청소년시절 좋아하던 라디오 프로를 먼저 떠올릴 수 있겠다. 고흐의 그림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윤동주의 시를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별이 총총한 하늘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바라본 행복한 경험을 가진 이들이라면 추억어린 미소를 머금을 수도 있겠다.

나는 대도시에서 자란 탓에,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단체 여행 중에 묵은 어느 산장에서 별이 빛나는, 아니 말 그래도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처음 보았다. 하늘에 별이 그렇게 많을 줄이야! 그 인상이 너무나 강렬해 이후 대학도 천문학과를 지원하게 되었지만, 결국 별에 대해 깊이 공부할 기회는 잡지 못했다. 그래도 지금 일하는 분야가 광학이고 천문대 찾아가길 좋아하는 것을 보면 그 별밤의 잔상은 아직 남아있는 듯하다.

도시에서는 별을 잘 보기 어렵다. 주위가 너무 밝아서이다. 언젠가 밤하늘의 우주쇼라는 유성우가 내린다 하여 가족들이 모두 별 잘 보이는 장소를 찾아다닌 적이 있다. 대덕 연구단지에 있는 아주 한적한 숲 언덕에 자리를 잡았지만 지평선이 너무 밝아 유성우는 거의 보지 못했다. 그때 새삼 도시의 밤하늘이 무척 밝음을 실감했다. 사람들의 별밤과 숙면을 앗아가는 도시의 무분별한 조명을 `광해`(light pollution)로 규제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우리가 매일 별을 보지는 않고 봐야 하는 것도 아니지만, 보고 싶어도 어두운 곳이 없어서 볼 수 없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초롱초롱 빛나는 별을 보고 있으면 머리가 텅 비고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 같다. 복잡한 현실을 떠나서 다른 세계에 들어가 있는 느낌도 든다. 예로부터 별은 꿈과 이상을 상징했다. 사람들은 별자리를 그리면서 아름답고 신비로운 이야기를 만들었고 별을 보면서 방향을 잡았으며, 별똥별을 보면서 소원을 빌어 왔다. 별은 우리가 결코 다다를 수 없는 곳에 있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사람들은 별을 보며 무한한 상상력과 호기심을 키워 왔고 현실보다 한걸음 더 전진할 수 있었다.

우리는 별만 올려다보며 살 순 없다. 그렇지만 별을 보지 않고 사는 삶도 어딘가 서글프다. 그것은 팍팍한 일상과 일시적인 향락에 묻혀서 꿈과 희망을 잊고 사는 삶과 닮았다. 먹고 살기에 정신없는 현실 속에서 내가 은퇴 후 정말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은 사치일 뿐이라고 느끼는 안타까운 삶과도 닮았다. "꿈이 밥 먹여 주냐?"는 논리로 본다면 별을 보는 것은 아무런 가치 없는 행동일 뿐이다. 그러니 한갓 별을 보기 위해 편리함과 안전을 제공하는 인공조명을 끄는 것은 어리석어 보일 수밖에 없다.

별은 본다는 것은 당장 눈앞의 현실에 매몰되지 말자는 의미다. 당면한 현실에 집중해 열심히 사는 것은 바람직하다. 하지만 당장 급하거나 이익이 기대되지는 않더라도 가끔은 눈을 들어 멀리 내다보기도 하고, 순수하게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일도 챙기는 것이 필요하다. 다양한 취미 활동이나 문화생활이 이에 해당 될 듯하다. 전공 분야와는 다른 새로운 배움의 길에 도전하는 것이나 미지의 땅을 여행하고 낯선 사람을 만나 보는 것도 좋겠다.

연구원 입장에서 좀 더 크게 본다면 나는 기초연구가 별을 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국제적 동향과 선진국 사례를 들면서 필요성을 설명하고 경제적, 사회적, 기술적 파급효과와 사업화 가능성, 정량적 성과목표 따위를 제시하지 않아도 되는 연구, 학자라면 이건 꼭 알아낼 가치가 있다고 스스로 몰입하는 그런 기초연구 말이다. 물론 우리나라 과학기술인은 헌법에 명시된 대로 `국민경제의 발전에 노력`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지만 그들 역량의 10%만이라도, 가끔 밤하늘의 별을 보듯이, 이런 기초연구에 쓸 수 있는 여건이 된다면 어떤 변화가 생길지 상상해 본다. 별은 어두워야 보인다. 꿈과 이상을 생각할 때 현실은 잠시 잊는 것이 필요하다.

이동훈 한국표준과학연구원 광학표준센터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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