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추억을 되찾아주는 글이 있다. 까맣게 잊은 정경을 불현듯 되살리는 표현이 있다. 잊었던 그림을 되찾고 가슴 설레다 벅차오르며 영원을 느낄 때 우리는 생의 덧없음에 개의치 않는다.

오다 말다 가랑비/가을 들판에/아기 염소 젖는/들길 시오리/개다 말다 가을비/두메 외딴집/여물 쑨 굴뚝에/연기 한 오리

이 시에 한참 붙들려 있었다.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선명한 형상과 운율이 마음결에 애잔한 물무늬를 그렸다. 영화 `마부`에서 여물 써는 아낙네를 보고도 그랬다. 가마솥에서 쇠죽 끓는 소리와 가을비에 젖은 냄새와 굴뚝 연기가 흩어지는 모습은 허기진 옆구리에 새겨진 그림이요 글귀다.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면 어느덧 언덕이나 산등성에 앉아 있는 기시감에 빠진다. 가을이 깊어지고 갈꽃이 흰빛으로 쇠어 저무는 햇살과 바람에 넋을 맡기고 있는 처연한 모습이나 모래톱 너머 눈부신 은결에 떠 있는 철새들의 자태를 담은 강물도 유장한 글이다. 강바닥에 묻혀있던 배를 끌어내 강물에 띄우고 힘이 부치게 노를 저어봤던 일이나 `물소리 까만 밤`에 손바닥에서 환한 미등을 밝히던 반딧불을 실은 지난 여름의 추억도 글귀에서 소금처럼 반짝인다. 물에 떠 있는 붉은 나뭇잎들도 어쩌다 호수에 뿌리와 둥치가 잠긴 나무들이 저물어가는 햇살에 찍어놓은 혈흔이며 글귀다.

가을의 글월 중에 읽을 때마다 눈시울 젖게 하는 것이 있다. "달빛은 또 그렇게 고와 동네는 매양 황혼녘이었고, 뒷산 등성이 솔수펑 속에서는 어른들 코골음 같은 부엉이 울음이 마루 밑에서 강아지 꿈꾸는 소리처럼 정겹게 들려오고 있었다. 마당 가장자리에는 가지런한 기러기떼 그림자가 달빛을 한 옴큼씩 훔치며 달아나고 있었다. 하늘에서는 별 하나 주워 볼 수 없고 구름 한 조각 묻어 있지 않았으며, 오직 우리 어머니 마음 같은 달덩이만이 가득해 있음을 나는 보았다."

가을은 글의 계절이다. 올가을에 짙은 그리움이 마음에 그리고 새긴 다감한 글귀를 만나 어둡던 마음이 불 켠 듯 환해지고, 사는 것처럼 살던 기분을 되찾는 청복을 누리시길 빈다.

권덕하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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