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경 해동백제 영농조합 대표
오창경 해동백제 영농조합 대표
가을은 어디에 눈길을 두어도 아름답다. 시골마을의 가을은 논마다 익어가는 벼들이 내뿜는 노오란 풍경들로 더 아름답다. 논둑길 사이를 걸어가면 노오란 물이 옷으로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요즘이 어디에나 명당이다. 내내 이런 풍광 속에서 살 수만 있다면 누군들 예술가가 되지 않을 수 없고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로 넘쳐나는 세상이 되었을 것이다.

인간은 환경의 영향을 받는 존재이다.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고 더 좋은 터전에 묻혀 대대손손 그 덕을 보고자하는 열망이 명당을 찾는 욕망이 되었다. 영화 `명당`은 이런 인간의 명당에 대한 추악하고 헛된 욕망의 속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조선 왕조는 특히 명당에 대한 욕심이 과했던 왕조였다. 다른 왕조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왕족의 태를 명당에 안치하는 독특한 태실 문화까지 발전시킨 왕조였다. 조선조에는 왕족이 태어나면 그 태를 성스럽고 소중하게 여겨서 전국의 길지를 골라 태실을 설치한다. 왕족의 태는 법도에 맞게 태 항아리에 안치하고 둘레석을 만들어 묘역 못지않게 잘 꾸며서 태실 비를 세워놓는다. 왕자의 태 항아리는 석실을 만들어 따로 보관한다. 그 중에 왕위에 즉위하게 되는 왕자가 나오면 태실이 태봉으로 승격된다.

내가 살고 있는 마을은 조선 왕조의 태실2기와 태봉까지 존재했던 곳이다. 지금은 왕조의 흥망과 격변기를 거치면서 기록과 비석만 남아 있지만 당대에는 지관들의 전문적이고 냉철한 분석 속에 명당 터라고 낙점을 받아 태실을 안치했던 곳일 것이다.

부여군 충화면 가화리에 위치한 조선조 18 대 왕인 현종의 딸이며 숙종과 남매지간이었던 명혜, 명안 공주의 태실 터가 바로 그곳이다. 왕실에서 그곳을 태실 터로 잡은 것으로 보아서는 명당 터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왕실의 발복과 안녕을 기원하며 탯줄까지 신앙처럼 숭배했던 결과에 비하면 명혜 공주는 9살, 명안 공주는 23살에 단명했다.

현재는 명혜 공주의 태실 터는 보존조차 되어있지 않고 태실 비도 충화 면사무소 앞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정림사지 안으로 옮겨져 있다. 안타깝게도 명혜 공주의 동생인 명안 공주의 태실비는 사라져버렸다. 동네 사람들에게 추적을 해본 결과 면사무소 앞 마당에 묻어버렸다는 말만 전한다.

조선왕조의 태실과 태봉은 전국 각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태봉`이라는 지명으로 불리는 곳에는 태실이 존재하는 곳이다. 조선왕조의 왕릉과 태실이 전국의 길지와 명당을 독점해 버린 것 같다.

부여군에는 우리 동네에 태실이 3기가 존재하고 규암면에 의혜 공주의 태실이 1기가 더 있다. 경북 성주군에는 왕자들의 태실이 20 기씩이나 남아있다. 백제의 유물을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부여군이 다른 왕조의 문화 유산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동안 다른 지자체에서는 태실 문화관까지 만들어서 관광 상품화는 물론 조선의 독특한 태실 문화를 잘 보존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왕가의 태실이 마을에 설치가 되면 그 주변에 사는 민초들의 삶이 더 피폐해졌다는 것이다. 태실로 낙점된 땅은 그 일대를 국유지로 수용을 했을 뿐만 아니라 관리를 두어 엄격하게 관리를 했다. 태실을 통해 왕가의 권위와 영속성을 유지하려던 조선 왕조의 정책의 이면에 백성들의 원성이 서렸고 한이 맺혔을 것이다. 백성들의 지지와 민심을 살펴 왕조를 유지하려는 기본을 무시하고 명당에 더 집착을 했던 결과물이 조선 왕조의 태실과 장묘 문화였다.

태조 이 성계는 풍수에 대한 유난한 신봉과 맹신으로 조선 왕조를 개국했고 태실과 왕릉을 선점해 전국의 명당과 길지를 찾아 매장하면서까지 영원한 왕국을 꿈꿨지만 이루지 못했다. 조선 왕조의 운명도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명당에 대한 집착은 왕족이었지만 나약한 인간에 불과했기에 명당이라는 좋은 환경에 의지하고자 했던 왕조의 욕망의 발로였다. 결국 풍수지리는 하나의 사상일 뿐 진리를 넘어서지 못한다.

풍수에 대한 지식은 전혀 없지만 왕가의 태실이 3 기씩이나 존재했었던 동네 살고 있기에 명당의 기를 받고 싶다는 바람이 생기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요즘처럼 살기 힘든 시기에는 명당의 덕을 보고 싶은 욕망에 한 발을 슬쩍 걸치고 묻어가고 싶다.

오창경 해동백제 영농조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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