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하면 가설없이 바로 실험하라

배워도 쓰지 못하는 것들이 많이 있다. 영어를 배웠지만 외국인과 대화하는 것은 어렵고, 코딩 교육을 받았지만 스스로 프로그래밍을 할 수는 없다. 간단한 게임이라도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초등학교 때부터 과학을 배웠지만 스스로 탐구하지 못한다. 배움은 오로지 성적을 위해 존재할 뿐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학생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일상생활에서 쓰지 못하는 것들을 열심히 배우고 있다. 이것이 대한민국 교육의 현실이다.

`탐구`라는 단어를 한번 보자. 2015 개정교육과정에서는 탐구 능력을 `과학적 문제 해결을 위해 실험, 조사, 토론 등 다양한 방법으로 증거를 수집, 해석, 평가하여 새로운 과학 지식을 얻거나 의미를 구성해 가는 능력`이라고 정의한다. 솔직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이해하기 어렵게 써놨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도 빠졌다. 알고 싶다는 호기심이 강하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증거를 수집해서 궁금증을 해결한다. 호기심이 빠진 탐구는 단팥 없는 찐빵과 같을 뿐이다.

콜라에 멘토스를 넣으면 분수처럼 콜라가 뿜어져 올라간다. 멘토스를 얼마나 넣어야 더 높이 올라가는지 궁금해 하는 학생이 있다고 하자. 우리나라 과학교육에서는 문제를 인식했으면 가설을 설정하라고 가르친다. 더욱이 가설은 결과를 추측하거나 예측하는 수준이 아닌 수학, 과학 지식을 동원해서 논리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그래야 검증할 수 있는 실험을 설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학 교사인 나도 가설다운 가설을 세울 자신이 없다. 무엇보다 가설을 세우다가 호기심이 사라질까 걱정된다. 궁금할 때 바로 실험해 보면 안 될까? 멘토스의 양을 조금씩 증가시켜가면서 실험을 해서 가장 높이 올라가는 조건을 찾으면 되지 않을까? 꼭 가설을 세워야 할까?

그렇지 않다. 가설을 세우지 않아도 된다. 미국의 과학교육 표준만 봐도 `가설 설정`은 없다. 궁금하면 바로 실험을 해서 과학적인 증거를 모으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증거들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설명을 만들라고 가르친다. 우리나라와 같이 기계적인 탐구과정에 집착하지 않는다. 미국을 따라하자는 주장이 아니다. 우리나라 과학교육은 너무 경직돼 있다.

미국의 차세대 과학교육 표준에는 유치원 교육과정부터 `과학과 공학 실천`이라는 학습 목표가 등장한다. 이는 급변하는 사회를 대비해 자연과학과 공학을 함께 가르치기 위해서다. 자연과학적인 요소가 다분한 `가설설정`을 탐구 과정에서 빼버린 것도 공학적 탐구를 고려한 것이다. 대학에 진학할 때 공대를 가면서도 고등학교 때까지 `공학`을 배우지 않는 우리나라의 교육과정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필자는 3년 전부터 학교 교육과정을 통해 공학적 탐구를 가르치려고 노력하고 있다. 과정중심 평가를 실시하면서 자연과학적 탐구와 함께 공학적 탐구도 허용하고 있다. 올해 1학기에 학생들이 탐구한 몇 가지 사례를 공유하고자 한다.

티라이트 양초를 태우고 나면 가장자리에 파라핀이 남는다. 이 문제를 인식한 학생은 파라핀이 남지 않도록 바닥을 경사지도록 만들었다. 어느 각도가 최적화된 각도인지 실험한 결과 12도일 때 파라핀이 거의 남지 않았고, 15분 정도 더 오래 탄다는 것을 알아냈다.

포스트잇을 떼었다 붙이면 위로 말려 올라가서 가독성이 떨어진다. 한 학생이 이 문제를 풀기 위해 포스트잇의 가로 길이와 세로 길이를 바꿔가면서 휘는 정도를 측정했다. 그 결과 가로 길이는 6.5cm, 세로 길이는 4.5cm 이하일 때 휘어짐이 최소화 되는 것을 발견했다. 물론 학생이 실험한 재질에 한정된 결과지만 공학적 탐구로 손색이 없다.

분무기에 넣는 다림질 풀의 농도를 조절해 물이 잘 퍼지게 만드는 방법, 같은 면적의 양면테이프로 물체를 가장 단단하게 고정하는 방법, 스테이플러로 종이를 철할 때 가장 튼튼하게 철하는 방법, 형광등에 비치지 않게 샤프로 글씨 쓰는 방법, 물병 세우기 놀이에서 물병을 잘 세울 수 있는 방법 등 학생 수준에서의 공학적 탐구들이 많았다.

가설은 없지만 과학적인 증거를 바탕으로 호기심을 해결한 이런 탐구가 진정한 탐구가 아닐까?

김종헌 대전과학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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