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3·1운동 100주년-충청 독립운동 유적지를 가다] ④ 아산 독립운동가 수당 이남규 선생

1919년 3월 14일 독립만세운동이 펼쳐졌던 아산장터 모습. 사진=황진현 기자
1919년 3월 14일 독립만세운동이 펼쳐졌던 아산장터 모습. 사진=황진현 기자
"나는 대부(大夫)다. 죽을지언정 욕을 당하여 너희에게 포박될 수 있겠는가."

일제의 식민지화가 가속화되면서 전국적으로 의병활동이 활발히 일어났을 당시 1907년 8월 19일 일본군이 그의 집에 파견됐고 체포될 당시 수당 이남규 선생이 한 말이다.

수당 이남규 선생은 1855년 11월 3일 서울 미동에서 태어났으며 향리는 충남 예산이다. 부친 호직과 모친 청송 심씨 사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875년 향시인 사마시에 합격했고 승문관권지부정자를 거쳐 형조참의·영흥부사·안동관찰사 등을 역임하다가 을미사변 후 예산으로 내려와 상소를 통한 반일운동을 전개했다.

수당 선생은 고려 말 충신이자 대학자인 목은(牧隱) 이색의 후손. 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단재 신채호의 스승이기도 했다. 1882년(고종 19년) 문과에 급제한 후 궁내부 특진관을 지내면서 고종을 보좌했으며 1893년 일본의 조선 내정간섭에 이어 명성황후 시해 등 일제 침략이 본격화되자 그들의 간교한 술책을 규탄하는 항일 상소를 잇따라 올려 고종에게 그 누구보다 일제와의 결전과 국권 회복을 직언한 인물이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에 이어 폐후조칙이 발포되자 당시 영흥부사이던 수당 이남규 선생은 `청복왕후위호 토적복수소`를 고종황제에게 올렸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청군신상하배성일전소`를 올린 뒤 깨끗이 처신할 것을 결심하고 두문 분출했다. 1906년 민종식의 홍주의진 선봉장에 임명됐으나 홍주성에 입성하지 않았다. 그러나 홍주의진이 크게 패하자 민종식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선생의 집을 중심으로 홍주탈환작전 본부를 구성하고 거사 준비도 갖췄다.

불행히도 이 계획은 누설된다. 충남 관찰사 김가진의 명에 따라 일본 헌병과 관군 수십 명이 수당 선생 부자와 이용규, 곽한일, 박윤식 등을 체포해 공주 감옥에 투옥했다. 곧 민종식의 거처를 확인하기 위한 잔인한 고문이 자행됐고 끝내 일본군은 민종식의 거쳐를 찾아냈다. 일본군이 그의 집에 들어 닥쳐 포박하려 하자 수당은 "선비는 죽일 수는 있어도 욕보일 수는 없다"는 사가살 불가욕(士可殺不可辱)이라는 말을 남겼다. 스스로 가마에 올라 집을 나선 선생은 충남 아산군 송악면 평촌리 냇가에 이르러 일본군의 마지막 회유에 "죽이려면 줄일 뿐이지 무슨 말이 많으냐"며 굴하지 않아 결국 목숨을 잃었다. 이때 선생을 따르던 맏아들 충구와 가마를 메고 가던 시자 김응길과 가수복도 일본군의 칼에 맞아 순국했다.

이규남 선생은 1907년 9월 26일 아들 충구와 교노 김응일과 함께 아산 평촌에서 순국했다. 당시 수당 선생의 나이는 향년 53세였다. 그가 살해된 사실은 민족지인 `대한매일신보`에 기사화되면서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됐다.

수당 이남규 선생의 순절비는 아산시 송악면 외암3리 595-136번지에 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986년에는 이남규 부자 순절 당시 유일한 생존자였던 가수복의 증언 내용을 바탕으로 위치를 확인해 현장에 `수당 이남규 선생 순절의 땅`이라는 기념탑이 건립됐다.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집단적 항쟁운동

아산의 3·1운동은 온양·탕정·염치·배방·송악·신창·선장 전 지역에서 3000명 이상이 3월 중순부터 4월 초까지 전개한 만세시위운동이었다. 이중에서 선장면 4·4독립만세시위 운동은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집단적 항쟁이었다. 100여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한 이 운동은 아산의 3·1운동의 대미를 장식했다

아산 선장에서는 4월 4일에 정수길·서몽조·임천근·오상근 등의 주도 하에 면민들이 군덕리 시장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정수길 등은 전국 각지에 만세시위가 전개되고 있음을 인지하고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결의했다. 이들은 시장에서 군중 수백 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고 오후 3시께 헌병주재소로 이동해 돌과 막대기로 건물과 창문 등을 파괴했다.

일제 헌병을 무력으로 군중들을 진압했다. 진압 과정에서 헌병조장의 발포로 최병수가 순국하는 등 사상자가 발생하고 많은 인사들이 체포됐다. 이 시위로 5명이 징역 2년 6월의 옥고를 치렀고 109명이 태 40-60대 형을 당했으며 1명이 10엔의 벌금을 징수하는 등 115명이 일제의 악형과 옥고를 겪었다. 지역에서는 `지역 후손들에게 선조의 항일독립운동을 뜻을 전하자`는 취지로 매년 4·4 아산독립만세운동 재현행사를 벌이고 있다.

또 무인멸왜운동은 1933년부터 시작돼 1945년 8월 15일까지 천도교 구파 세력에 의해 아산 선장면 일원에서 주도됐으며 `멸왜기원 기도문 암송`, `특별희사금 모집운동`, `특별기도 운동` 등을 펼쳐 항일독립의식이 면면히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로 남아있다.

면민들의 만세시위 아산리 장터

영인면에는 3월 14일에 처음 독립만세를 불렀다. 옛 아산의 구읍인 아산리 시장에서 오후 1시께 약 15명이 태극기를 들고 나타나 시장에 있는 군중들에게 독립만세를 함께 부르자 자 학생과 시장에 있던 군중 130여명이 합세해 만세시위를 벌였다. 일제 헌병들이 출동해 일단 주동자를 체포해 독립만세운동이 잠시 진정되는 듯 했으나 오후 6시께 읍 밖에서 수백 명이 집결해 아산리 읍내로 진입하면서 다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됐다. 온천리 헌병분견소에서 진압하기 위해 헌병 7명이 급히 출동했고 주동자 9명을 체포해 해산시켰다. 이 독립만세운동은 신화리와 신운리 주민들의 중심으로 전개된 독립운동이다. 온천리 헌병 분견대에서는 시위운동에 참여한 주민들을 붙잡아 약 1달 동안 갖은 고문을 가한 후에 재판에 넘기지 않고 4월 15일 즉결처분인 태형으로 다스렸다. 다행이 영인면 사무소에 당시 태형을 당했던 주민들의 명단이 적힌 수형자 명부가 남아 있어 참여자 중 일부를 알 수 있었다. 태형을 받은 부민은 신운리 주민 10명, 신화리 주민 7명 등 총 17명이었다.

황진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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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선장에 세워져 있는 기미독립·무인멸왜운동 기념탑. 사진=황진현 기자
아산 선장에 세워져 있는 기미독립·무인멸왜운동 기념탑. 사진=황진현 기자
1919년 4월 4일 독립만세운동이 펼쳐졌던 선장장터 모습. 사진=황진현 기자
1919년 4월 4일 독립만세운동이 펼쳐졌던 선장장터 모습. 사진=황진현 기자
수당 이남규 선생 순절비. 사진=황진현 기자
수당 이남규 선생 순절비. 사진=황진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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