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우리나라 지방 공립미술관들이 처한 상황은 참으로 난감하다. 미술관 밖에서 쳐다볼 때보다 내부에서 들여다볼 때 더욱 한심한 경우가 많다. 겉으로 그럴듯한 전시를 올리고 명성을 쌓아가는 미술관들도 내부적으로는 곪아 터지기 직전의 문제 덩어리들을 끌어안고 있는 실정이다.

특정 사안들이 문제라고 인식될 때는 어떻게든 해결점을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지만, 특이하게 우리나라 지방 공립미술관들은 지역과 규모가 달라도 비슷한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한 채 안고 간다. 개관한 지 20년이 된 미술관이건 이제 막 시작된 미술관이건 남쪽 미술관이건 북쪽 미술관이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구조적인 모양새는 거기서 거기인 것이다. 미술관 관계자들끼리 만나 이야기하다 보면 웃음이 날 정도로 유사한 상황에 봉착해있다.

먼저, 대부분이 `어공(어쩌다 공무원)`인 전문직 학예사들과 예술행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늘공(늘 공무원)`이 미술의 문제를 놓고 벌여야 하는 꽉 막힌 소통 부재의 문제, 이것은 대부분의 공립미술관 사무실에서 발생하는 일상적인 이슈이다. 공무원 행정시스템은 그 시스템 내에서 벌어지지 않았던 일의 처리에 있어서는 지독히도 보수적이다. 뿐만 아니라 일반 행정과 예술 행정의 차이가 내부적으로 자각되지 못하는 경우, 동사무소 간판 교체하듯이 각종 겁 없는 결정들이 `늘공`들에 의해 시행되기도 한다.

이보다 더한 문제는 때때로 민선 지자체장의 개인적 보은의 성격을 띠는 관장 인선, 그러한 통로로 채용된 관장이 시정(혹은 도정)에 부응한다는 명목으로 벌이는 정치적 성격의 전시들도 지방 공립미술관들에서 흔히 보이는 풍경이다. 시정이나 도정의 홍보용이 되거나 부대 행사쯤으로 역할을 하는 전시가 상명하달식으로 급조되기도 하는 것이다.

공공기관에 대한 `민원`과도 같은 지역 미술단체들의 요청들이 미술관의 기획이나 각종 프로그램에 부담을 지우는 일 또한 빈번하다. 미술이 있기에 미술관이 존재하는 것이므로 미술가들과 미술관의 관계는 공생 관계일 수밖에 없지만, 공립미술관의 전시가 관객을 중심에 두어야 하는지 `이해관계`가 각각 다른 미술인들의 요구를 중심에 두어야 하는 것인지는 숙고해 보아야 할 일이다.

하나하나의 사례를 말하자면 하룻밤을 새워 입 아프게 말해도 다 말하지 못할, 별다른 해결책도 보이지 않는 이러한 유형의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오히려 말하면 입만 아프기 때문에, 말하지 않고 덮어두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무엇 하나가 개별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들이라기보다는, 모든 분야에서의 수준이 고르게 높아지면서 점차 완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미술관에 발령을 받고 난생처음 미술관에 발을 들이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작품 감상을 즐기고 문화 전반에 대한 존중감이 있는 공무원이 미술관에서 행정과 시설을 담당하고, 선거 캠프에서 도움을 주었던 고마움을 표시하는 데 있어서 공사(公私)를 구분할 줄 아는 지자체장(長)을 선출하며, 문화예술과 같이 전문적인 영역은 전문가들의 견해가 일차적으로 존중받고, 수도권이 아닌 지역의 미술과 미술가들 역시 그 의미에 따라 정당하게 평가받고 고르게 주목받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는 것, 이런 정도의 환경이 조성되었을 때 공립미술관은 소모적인 제자리걸음의 쳇바퀴에서 벗어나 제 할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윤희청주시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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