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건물주가 되고 싶어요."

최근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청소년들의 장래의 꿈을 묻는 인터뷰 중 여럿이 입을 모아 한 답변은 건물주가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런 말들이 쉽게 수긍될 만큼 한국에서 건물이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단순히 추위와 더위, 비, 바람을 막고 그 속에 들어 살기 위해 지은 공간이 아닌 것이다. 아파트라면 그것의 평수는 얼마나 되고 어떤 브랜드인지, 자기 소유인지 임대인지에 따라 계층이 나뉘는 자본주의 시대가 만든 새로운 신분사회에 가깝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시대가 위의 청소년들에 답변처럼 건물주가 되면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 물론 번듯한 건물 한 채를 갖고 세를 받는 임대인 삶을 산다면 직장에서의 여러 스트레스를 감내하며 살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말을 한번 쯤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분명 풍자적 표현임에도 자본주의 색 짙은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대변해주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시대만이 이런 불안의 증폭으로 안정을 추구하려 하였을까? 미술사학자 아놀드 하우저(Arnold Hauser)에 의하면, 전성기 르네상스 시대를 살은 사람들조차 그들의 시대가 너무나 변화무쌍한 격동의 시기였기 때문에 조화와 안정을 추구했다고 했다.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들은 역설적이지만, 불안과 동요를 통해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탐닉했다고 한다.

현재 우리에 삶은 모든 것이 과잉 생산, 공급으로 인한 `잉여`가 만연하고 있으며, 이러한 포화와 잉여 속에 가려져, 진정한 행복과 풍요를 느끼는 대신 우리의 삶은 오히려 궁핍하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이러한 `풍요 속 빈곤`을 느끼는 현대사회가 르네상스시대와 같이 예술로써 우리의 삶을 다르게 볼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 할 수 있을 것인가.

이미 많은 예술가들은 이런 삶을 바꿔 보기 위해 공공이라는 이름 하에 우리의 삶 속에 깊숙이 관여해오고 있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무엇이 바뀌고 거기서 무엇을 읽어내야 하는지 궁금해 하고 있다. 삶이라는 열린 공간에서 진정한 예술이란 함께 한다는 의미이며 같이 고민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좋은 예술은 보다 나은 삶을 향한 의지와 그 방향을 같이한다. 백요섭 미술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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