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경제력 급신장으로 촉발된 미·중 간 헤게모니 경쟁이 본격화되면서 한국의 선택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1980년대까지 만해도 한국의 대외관계는 안보와 무역, 그리고 금융질서가 모두 미국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10여 년 전부터 대중 수출비중이 미국의 2배를 상회하면서 안보는 미국에, 무역은 중국에 주로 의존하는 비대칭적 양상을 겪어 왔다. 게다가 2년 전 중국 주도로 출범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의 회원국이 84개국으로 늘어나 미국과 일본이 주도하는 아시아개발은행(ADB)의 회원국 수(67개국)를 능가하면서 금융질서도 꿈틀되고 있다. 대출규모는 아직 크지 않지만, 자본금이 ADB를 상회하면서 아시아 개발의 강력한 돈줄로 떠오른 것이다.

한편 중국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성장동력이 신흥국으로 넘어오자 70년 이상 미국이 지배해 온 국제통화기금(IMF)의 지분율 조정을 요구하게 된다. 그 결과 자국의 지분율을 세계 3위(6.4%)로 높이고, 위안화를 특별인출권(SDR) 바스켓통화에 편입시킴으로써 3대 준비통화로 끌어올렸다. 얼마 전에는 라가르드(Lagarde) IMF 총재가 10년 내에 IMF 본부를 베이징으로 옮길 수도 있다는 깜짝 발언이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경제규모가 가장 큰 회원국에 본부를 둔다`는 IMF의 정신에 비추어볼 때 중국의 경제규모가 조만간 미국을 추월한다면 황당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국제투자시장에서도 서구의 영향력이 위축된 사이에 세계 최대의 외환보유국으로 부상한 중국은 해외투자 확대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중국은 세계 10대 국부펀드 중 3개를 거느리고 있으며, 중국투자공사(CIC)가굴리는 자금만 1조 달러에 육박하고 있다. 소위 차이나머니가 전세계의 에너지와 자원을 매집하고, 실리콘밸리의 첨단기업과 두뇌를 사들이고 있다. 예컨대 중국의 투자펀드인 시노베이션(Sinovation)은 300여개의 신생 벤처기업을 웃돈을 주고 사들이며 미국의 천재들이 개발한 특급기술을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이고 있다.

또 중국은 아시아는 물론 남미, 아랍 국가들과 통화스왑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금융영향력을 성큼성큼 확대해 나가고 있다. 한국도 이미 한중 통화스왑(560억 달러) 규모가 전체 통화스왑의 절반에 가까울 정도로 글로벌 금융안정망에서 중국 의존도가 높아져 있다.

이런 가운데 정부는 지난해 북한 개발을 통하여 한반도 발전 축을 중국 및 러시아와 H자로 연결하는 신경제지도 구상을 제시한 바 있다. 바야흐로 남북한 정상회담에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이 선언되었으며, 곧이어 개최될 북미 정상회담이 성과를 거두어 북한의 대외개방으로 연결된다면 동북아는 획기적인 발전의 전기를 맞이할 것이다. 이러한 호기를 맞아 북한을 포함한 동북아 개발을 촉진하기 위해서는 경협여건 조성과 함께 개발자금 동원이 관건이 될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나 유럽이 북한에 대규모 개발자금을 투입할 가능성을 크지 않다. 때마침 중국은 남중국해에서의 국경분쟁과 주변국의 경계로 인해 일대일로 프로젝트들이 주춤하고 있으며. 위안화 국제화도 속도가 나지 않는 상황이다.

이럴 때에 우리는 안보는 미국에, 경제는 중국에 의존한다는 논리에 매달려서 위험한 곡예운전을 할 것이 아니라 국제질서 변화를 능동적으로 리드해 나가야 한다. 상대가 미국이든 중국이든 GDP규모가 세계 10위권인 중견국(middle power)으로서 우리의 전략적 위치를 설정하고, 대등한 입장에서 대외 경제협력을 추진해 나가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서남아시아에서 파열음을 일으키고 있는 일대일로 사업의 물줄기를 투자여건이 한층 개선될 동북아로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북한 개발에 탄력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미·중 양강의 각축전 속에 동북아 질서가 재편되고 있는 만큼 한국이 가진 전략적 가치를 잘 활용한다면, 다양한 경우의 수가 생기지 않겠는가. 임호열 경기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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