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를 걷는 시간

도시를 걷는 시간
도시를 걷는 시간
"실없거나 얼없게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그곳에 서면 그들이 보인다. 너울너울 나비춤을 추는 광대들, 전란 한가운데서 신분의 굴레를 불태우고자 횃불을 들고 달리는 노비들, 무쇠솥 안에 가둬졌다 살아있는 유령이 되어 끌려나오는 탐관 오리들, 붉은 뺨을 가진 소년 이순신과 꿈에서 막 깨어나 몽롱한 안평대군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저자는 서울 시내에 있는 표석(標石)을 보며 지나간 과거의 흔적을 더듬는다. 우리가 흔히 만났던 이들의 흔적은 다만 길모퉁이나 화단 한 구석에 쌩뚱맞고 무심한 돌 하나로 남아있다.

저자는 표석에 남겨진 인연 혹은 사연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그는 표석에 아로새겨진 글귀 이면의 사연을 보고 들었다.

오래된 도시 서울에는 올 3월 기준으로 316개의 기념 표석이 설치돼있다. 1394년 조선의 정궁이 옮겨진 뒤 줄곧 수도의 자리를 지켜온 곳이 서울임을 헤아려볼 때, 지금의 일상적인 공간이 그 때의 사람들에게도 삶의 터전이었음을 떠올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바삐 흘러가는 생활 속에서 지난 시간을 가만히 상상해보면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

저자는 사대문 안팎에 놓인 조선시대 주요 국가 기관들과 당시 서민들이 살아낸 생생한 삶의 흔적들 32곳을 직접 찾아가며 문장에 담았다. 충무공 이순신, 추사 김정희 등의 역사적 인물과 관련된 표석이 품고 있는 다채로운 이야기를 풀어내어 독자들을 수백 년 전 서울로 초대한다.

저자는 `역사는 그저 과거가 아니라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만나는 모든 순간`이라고 말한다. 수천, 수백 년 전 바로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과 삶을 상상하며 그려내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과거를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이자 올바르게 기억하는 법인 것이다.

이 책에는 표석을 둘러싼 주변 전경 사진을 함께 수록해 독자들이 익숙한 공간에서 시간 저편의 삶을 떠올릴 수 있게 했다. 총 5장으로 구성됐으며 왕실의 음악 교육을 담당했던 장악원, 단종 비 정순왕후의 비극적인 이야기가 담긴 정업원 등 왕실의 빛과 그림자를 엿볼 수 있게 하는 표석, 노비 문서를 보관하던 장예원, 탐관오리에 대한 형벌을 거행하던 혜정교 등 도시 곳곳에 스며있는 삶의 애환을 담았다. 또 소금 거래 기관인 염창, 도시의 치안을 관리한 포도청과 죄인을 수감하던 전옥서 등을 다뤘다. 작가는 세심한 시선으로 표석을 따라가며 시간의 무게에 묻혀있던 수많은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펼쳐보인다. 강은선 기자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강은선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