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의 멘토를 자처하던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는 자신이 아들(명종)을 낳자 세자로 삼기 위하여 세자 시절의 인종을 견제했다. 이런 가운데 세자궁에 불이 났는데, "야사에 따르면 인종은, `어머니가 나의 죽음을 원하시니 그에 따르는 것이 효가 아니겠는가`라며 자리에 앉아 불에 타죽기를 기다렸다. 이 때 밖에서 중종이 애타게 그를 부르자, `이대로 죽으면 어머니에게는 효가 되지만 아버지에게는 불효와 불충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밖으로 나왔다고 한다"(`나무위키` 조선의 왕).

인종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3번이며 별칭은 `성취자`이다. 그의 성격특성은 허영과 안전이라는 격정으로 규정된다. 이들은 타인에게 좋게 보이고 싶고 미덕에 가치를 두지만 적극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는 않는다. 자신과 가족 그리고 자신에게 의지하는 사람들의 재정적 물질적 안전을 얻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

1515년(중종 10)에 태어난 그는 모친인 장경왕후 윤씨가 산후병으로 사망하면서 평탄치 못한 어린 시절을 겪었다. 그는 1520년(중종 15) 세자로 책봉되었지만 문정왕후 외에 자신의 아들을 세자로 세우려는 이복형 복성군의 모친인 경빈 박씨의 견제에도 시달려야 했다. 그는 이렇게 25년간 시련을 겪은 후에야 1544년 30세에 왕위에 올랐다.

그는 인자한 호문의 군주답게 성리학에 바탕을 둔 도학정치를 펼치려 노력했다. 기묘사화로 죽임을 당한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들을 신원하고 현량과를 부활시키는 등 좌절된 정책들을 되살리고자 했다. 사관이 자신이 기록한 사초에 이름을 써넣지 않도록 하는 규정을 부활시키기도 했다.

다음과 같은 기록도 있다. "성품이 조용하고 욕심이 적었으며, 효심이 깊고 형제 간의 우애가 돈독했다. 3세 때부터 글을 읽기 시작했고, 1522년에 관례(冠禮)를 행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매일 세 차례씩 글을 읽었다. 중종의 병환이 위독할 때는 반드시 먼저 약의 맛을 보고, 손수 잠자리를 살폈다. 부왕의 병환이 더욱 위중하자 침식을 잊고 간병에 정성을 다했다. 동궁으로 있을 때는 화려한 옷을 입은 시녀를 궁 밖으로 내쫓을 만큼 검약한 생활을 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그는 과도하게 그를 압박하는 문정왕후를 예를 다해 섬겼으며 이복 동생인 경원대군과도 사이가 좋았다. 심지어는 그를 모해한 혐의에 연루된 복성군이 귀양가게 되자 부친인 중종에게 석방을 탄원하기도 했다.

그가 오랜 기간의 세자 시절과 짧은 재위 기간 내내 가족간의 도리, 근검절약, 정책 수행에 있어서 충실성 등을 보인 것은 자신이 좋은 가족 구성원이고 도덕적이며 뛰어난 임금임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에니어그램 3번 유형이었던 그는 일생 동안 어린 시절 충분한 보호를 받지 못한데서 기인한 불안에 시달렸을 수 있다. 그는 치열한 노력으로 이를 극복함으로써 완벽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했고, 이것이 적지 않은 스트레스가 되어원래 병약했던 그의 건강에 치명적으로 작용하였다. 그는 재위 8개월 만인 31세에 승하했다. 현상진 대전시민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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