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9년(정조 13) 10월 16일 양주 배봉산 수은묘에 묻혀있던 사도세자의 시신은 아들 정조에 의해 화성의 현륭원으로 이장되었다. 이에 앞서 7월 11일에 조정에서 이장에 대한 결론이 나자 정조는 "갑자기 말을 하기가 어려우니 계속 진달하지 말고 나의 기운이 조금 내리기를 기다리라"고 했다(이덕일, 2010).

27년 전 부친이 뒤주에 갖힌 채 죽어가던 참상을 목도한 아들의 입장에서는 감개무량한 일이었다.

정조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1번이며 별칭은 개혁가다. 그의 성격특성은 분노와 경직·열의라는 격정으로 규정된다. 이들은 올바른 삶의 역할 모델이 되고자 하며, 타인의 잘못을 시정하도록 요구하고 비판적으로 우월함을 과시하며 분노를 표출한다. 주변을 개선하고자 하며 개혁의 결과를 상상하고 쾌감과 열정을 느낀다.

1752년(영조 28) 장헌세자의 아들로 태어난 정조는 여덟 살에 세손으로 책봉되었다. 1762년 부친이 죽임을 당하자 요절한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하여 왕통을 잇고, 1776년 영조가 승하하자 25세에 왕위에 올랐다.

그가 왕위에 오르기까지는 명분상 죄인의 아들이라는 굴레와 함께 지속적인 견제에 시달려야 했다. 즉위 1년 전 영조의 지시에 의한 대리청정은 노론의 결사반대에 부딪혔고, 심지어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를 비롯한 반대파들은 즉위를 방해하고 나섰다.

이런 악조건을 극복하고 1776년 3월 10일 경희궁에서 치루어진 즉위식 말미에 정조는 "오호라!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선대왕께서 종통의 중요함을 위하여 나에게 효장세자를 이어받도록 명하신 것이다"(이덕일, 2010)라고 하였다. 이미 사도세자 문제에 대한 일체의 언급을 금한 선왕의 유훈이 있는 상황에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 말은 에니어그램 1번 유형답게 사안의 옳고 그름에 대해 비판적으로 분노를 표출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 정조는 1번 유형의 절제된 행동을 보였다.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으로 올리고, 부친의 죽음에 직접 관련되며 왕권 행사에 결정적으로 장애가 되는 인사에 대한 최소한의 조치에 머물렀다. 아직도 노론을 중심으로 한 막강한 반대 세력이 궁궐 안팎에 널린 상황이었다. 실제로 1777년(정조 1) 7월과 8월에 그가 머물던 존현각에 자객이 들어 위해를 시도하는 일이 벌어질 정도였다.

정조는 개혁의 깃발을 올릴 훗날을 기약하며 자중했다. 오매불망하던 부친의 묘 이장은 재위 13년의 일이고, 핵심 개혁 조치 중 하나인 화성 신도시 건설을 시작한 때는 재위 18년이었다.

그는 규장각을 설치해 정권의 핵심적 기구화함과 동시에 문화정치를 표방했다. 남인에 기반한 실학파와 노론을 근거로 한 북학파의 장점을 수용하였고, 당시 사회문제였던 서학(西學; 천주교)에 대응하기 위해 정학(正學)의 진흥이 필요하다며 유연성을 보이기도 했다.

정조가 의도한 개혁은 1800년(재위 24) 6월 28일 그의 죽음과 함께 동력이 끊기고, 조선사회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할 절호의 기회도 사라지고 말았다. 현상진 대전시민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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