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가 어릴적에 "천자문을 읽다가 `사치할 치(侈)`자를 보고는 입고 있던 반소매 옷과 자줏빛 비단으로 만든 구슬 꾸미개로 장식한 모자를 가리키면서 `이것이 사치한 것`이라고 하고는 즉시 벗어버렸다. `비단과 무명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나으냐`고 부왕이 묻자 `무명이 더 낫다`면서 무명옷을 입겠다고 대답했다.(어제장헌대왕 지문)"(인물한국사).

사도세자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4번이며 별칭은 `개인주의자`이다. 그의 성격특성은 `시기심`과 `수치·불굴`이라는 격정으로 규정된다. 이들은 감정적으로 예민하고 비탄에 빠지기도 한다. 열등감에서 비롯되는 자기 비하의 경향이 있으며 욕구와 분노를 표현하는데 부끄러워한다. 수치와 공포를 자주 느끼며 이것이 그들을 독특해 보이게 한다. 때로는 자학적이며 불굴의 투지를 나타낸다.

사도세자는 1735년(영조 11) 1월 21일 당시 41세인 영조와 영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첫 아들인 효장세자가 9세에 요절한 지 7년 만이었으므로 곧바로 그를 중전의 양자로 하여 원자로 삼았으며, 1년 후 세자로 책봉했을 만큼 영조의 기쁨은 매우 컸다. 세자는 8세 때 홍봉한의 딸과 혼인했는데, 훗날 한중록을 쓴 혜경궁 홍씨가 바로 그녀다.

여러 기록은 그가 어려서부터 매우 영특했으며 무예놀이를 즐겼다고 전하는데, 9세 때 영조가 "`글을 읽는 것이 좋은가, 싫은가`하고 묻자, 그는 `싫을 때가 많다`고 대답했다."(인물한국사).

당시는 왕세자라면 성리학에 근거한 제왕학 학습이 필수였으므로 영조는 자신이 걸어왔던 바대로 세자를 규율하고자 했으나, 무인기질이 다분한 데다가 독특함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보이고 싶어하는 세자에게는 버거운 일이었다. 여기서부터 영조와 세자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세자가 14세 때 시작된 대리청정은 정무적인 능력을 키우고자 한 의도였으나, 그의 가치관과 자질이 그대로 노출돼 이미 다섯 차례나 양위 파동을 일으킬 정도로 감정의 기복이 심한 영조를 만족시키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입으로는 탕평을 말하였지만 사실상 친노론 성향인 영조에게 대립각을 세웠던 소론의 입장에 동조하는 세자는 정치적인 입장에서도 부왕과 충돌하는 일이 잦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나주 객사인 망화루 정문에 붙은 `간신이 조정에 가득해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졌다`는 내용의 이른 바 나주백서 사건에 대한 대응인데, 소론 강경파에 대한 대규모 정치보복에 세자는 다른 견해를 보였다.

이는 4번 유형들의 불굴의 투지와 자신에게 느끼는 결핍 상태를 보상할 독특함을 찾는 심리적 기저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세자에게 매우 현실적인 영조는 엄청난 정신적 부담으로 작용해 그가 감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는 기록에서 전해지듯이 그가 1762년(영조 38) 윤5월 부왕에 의해 사사되기 전에 보인 여러 가지 기행에서도 짐작되는 일이다.

4번 유형의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시기심에서 비롯되는 독특함은 종종 현실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을 어렵게 하기도 한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현상진 대전시민대학 강사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