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태종의 장남이자 세자였던 양녕대군은 도를 넘은 호색이 큰 병폐였다. 한 번은 전 고위관리의 첩을 겁탈하고 강제로 세자궁에 끌어들이자 태종이 크게 노하며 질책하였다. 양녕은 태종에게 편지를 보낸다. `전하의 여자들은 다 궁중에 받아들이면서 왜 신의 첩들은 궁에서 내보내십니까? 어찌 스스로 뒤돌아보지 않으십니까?` 요컨대 아버지는 되는데 왜 나는 안 되는가? 그리고 반성하시라는 얘기였다. 격분한 태종은 드디어 삼남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봉하면서 생각처럼 되지 않는 자식일로 통곡하였다. 태종 18년 6월 3일의 일이다. 세종의 등극은 그야말로 형 양녕의 자살골 덕분이었고 또 태종의 결단은 결과적으로 대성공이었다. 명군 세종의 빛나는 치적이 그 증거이다.

잠시 쉬어가자. 중국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남북조 시대 송나라 산음공주 유초옥(劉楚玉)은 동생이자 황제인 유자업에게 평소의 불만을 털어놓았다. `비록 남녀의 차이는 있으나 폐하와 저는 모두 선대 황제의 혈육입니다. 그런데 폐하께선 후궁을 수천이나 거느리시고 저는 남편 한 명밖에 없으니 이 얼마나 불공평한 일입니까?` 이에 황제는 공주에게 30명의 미소년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황음무도했던 폭군 유자업이 시해되고 이어 초옥이 음란죄로 사형을 당하며 그 30명의 남첩들도 함께 순장되고 말았다.

세종의 즉위 후에도 양녕의 행동은 여전했고 그의 거듭되는 비행에 신하들의 탄핵이 줄을 이었지만 세종은 항상 형을 배려하고 벌하지 않았다. 심지어 양녕이 자신의 삼남 서산군의 첩을 빼앗자 그 아들은 울화병에 걸려 술김에 사람을 죽이는 일도 자주 있었다. 세종의 친인척 관리엔 이렇듯 문제가 많았다.

왕가에서 형제들이란 과연 무슨 의미를 가질까? 한 때 중동과 동유럽을 호령했던 오스만 터키에서는 새 황제가 즉위하면 즉시 모든 형제들을 몰살하는 이른바 `형제살해(fratricide)`의 전통이 있었다. 정권의 안정을 위해 잠재적인 왕권 경쟁자들을 원천적으로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조선의 교범 중국 황실에서도 골육간의 피바람 부는 상쟁은 다반사였고 태종 역시 두 번이나 왕자의 난을 일으키며 이복동생 방석 방번을 죽였고 친형 방간은 귀양을 보냈었다.

현명한 세종이 그런 이치를 몰랐을 리 없다. 뛰어난 자질에 어진 인품의 장남을 세자로 삼았지만 장남 문종은 너무나 병약했다. 명석했던 손자 단종의 앞날을 생각하면 혈기왕성한 둘째 아들이 마음에 걸렸다. 딴 마음 먹지 말고 백이 숙제의 충의를 따르라며 수양(首陽)이라는 존호까지 내리기도 했지만 그래도 못미더워 신하들에게 두고두고 단종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우려하던 일은 결국 터지고 말았다. 허나 양녕은 조카 세조와 한 배를 타며 세조에게 단종을 죽이라고 끈질기게 간청하였다. 세종의 또 다른 아들 안평대군 금성대군도 죽음으로 몰았다. 그러고도 왕실어른으로 대접받으며 무려 10남 17녀의 아비로 천수를 다했다. 세종은 후계자 선정이란 정치에서는 철저히 실패한 군주였다.

무릇 세습되는 `힘`은 형제를 서로 멀리 갈라놓는다. 반면 세습되지 않는 `힘`은 형제를 가까이 모은다. 하지만 멀든 가깝든 위험하긴 피차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지금도 세습되지 않는 권력자의 형제는 이후 자칫 감옥살이가 십상이고 세습이 보장되는 재벌가에선 형제의 난이 끊이지 않는다. 그리고 보통사람이라 해서 이 원리를 크게 벗어나는 건 아니다. 유창영 대전보건대 인문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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