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땡볕에 소여물 쑤던

할머니 머릿수건이 벌겋게 익을 때쯤

만경벌 지평선으로

부지런한 낮달이 석양을 내려놓고

굴뚝도 달궈진 숨을 내쉰다

들녘 볏 짚단이 검붉게 타올라야

논 일 마치신 할아버지

막걸리 잔 술에 오른 취기로

자전거 바큇살에 감긴 어둠을 끌고

비틀비틀 집으로 돌아오셨다

마당에 멍석 깔고 모깃불 놓으면

이른 달빛 사이로 별들이 강물처럼 흐르고

누렁이 마냥 정지를 기웃거리면

고봉으로 담긴 하얀 쌀밥 밥상이

모락모락 손짓을 하곤 했다.

누구에게나 한 자락 유년의 풍경이 없겠는가. 어쩌면 우리들 삶의 총체성이 살아 흐르던 때. 세계와의 갈등 출현하기 이전의 평화롭고 아늑한 축복처럼 다가온다. 대지의 모성이 지배하던 때. 풍요와 다산의 땅이 펼쳐있고 그 위에 벌이던 신성한 노동. 그리고 저물녘 가족과 함께 하는 밥상과 휴식이 기다리던 곳. 저녁을 먹고 나면 하늘엔 달빛 흐르고 그 강물 위로 별들이 깨알처럼 뿌려지곤 했지. 그때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권위와 위엄이 우리 삶을 품어 안고 기르던 때. 오, 그 시절은 그대로 한편의 시이고 또 신화가 아니었나. 그건 진정한 우리 고향의 얼굴.

우리에겐 언제나 싱싱하게 살아있는 곳. 그 오래된 미래가 못내 그리울 때 있다. 우리들 삶이 돌아가 안겨야 할 곳. 그러나 그곳은 이미 우리 삶의 형식으론 사라지고 만 곳. 그러나 우리가 그 정신 살려내 다시 귀향해야 할 곳.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이 힘껏 피었다 지고 다시 피고. 부지런한 낮달이 석양을 내려놓으면 들녘 볏 짚단은 검붉게 타오르고. 이른 달빛 사이 별들은 강물처럼 흐르는데. 고봉으로 담긴 쌀밥이 모락모락 손짓하는 곳. 아, 어쩌면 우리가 살아서 경험한 최후의 그 낙원. 김완하 시인·한남대 국어국문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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