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6년 흥선대원군은 충청남도 (예산군)덕산 대덕사의 한 고탑(古塔)이 길지라는 말을 듣고 경기도 연천에 있던 부친 남연군의 묘를 이장했다. 이때 그는 주지에게 거금을 주고 절을 소각하게 했는데, 형들의 꿈에 똑같이 탑신이 나타나 `이곳에 묘를 쓰면 너희 4형제가 폭사할 것`이라고 위협하자 모두 두려워했지만 막내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씨의 문전을 다니며 구차하게 사는 것보다 차라리 한 때 잘 사는 것이 쾌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일갈하고는 이장을 단행했다."(이덕일, 2010)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8번이며 별칭은 `도전자`이다. 그의 성격특성은 `욕망`과 `만족(satisfaction)`이라는 격정으로 규정된다.

이들은 물질적 필요가 적시에 충족되기를 바라는 강한 욕구가 있으며 좌절을 견디지 못한다. 강하고 공격적인 방식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향해 나아간다. 비즈니스를 잘 알고 상대가 누구이든 우위에 서는 법을 안다.

1820년(순조 20년) 인조의 셋째아들 인평대군의 8세손으로 태어난 흥선대원군은 그의 아버지 남연군이 정조의 이복형제인 은신군의 양자가 됨으로써 영조로부터 이어지는 왕가의 일원이 되었다. 헌종의 왕위는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의 손자인 철종으로 이어졌는데 1863년 12월 철종이 후사가 없이 사망하자 그의 가계도 왕위에 다가설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는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절정을 이루었고 조금이라도 왕재로서 가능성이 있는 인물은 이들로부터 지속적인 견제를 받아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공식적인 가계 서열상 왕위와 가까운 자리에 위치하게 된 흥선대원군은 8번 유형다운 처신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종친부의 유사당상(有司堂上)과 오위도총부의 도총관 등의 관직을 역임하여 불우하다고 하기는 어려우나 그는 파락호 행세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는 그에게 집중되는 세간의 시선을 분산시키면서 목숨을 부지하고 가까운 거리로 다가온 권력을 거머쥐기 위한 의도에서 나온 행위였다.

드디어 그의 차자인 명복이 효명세자와 대왕대비 조씨의 양자로 하여 11세에 임금의 자리에 오르자, 흥선대원군은 고종의 치세 초기 10년 간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였다. 그는 외척의 발호를 막기 위하여 안동 김씨와의 약속을 져버리고 빈한한 여흥 민씨 집안에서 고종의 비를 들이면서까지 세도정치를 타파해 쇠락한 왕권을 다시 세우고자 했다. 그리고 외세의 침략에 대비해 조선을 중흥할 혁신정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그러나 최익현의 탄핵 상소를 계기로 1873년 권좌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명성황후와 치열한 권력다툼을 계속하면서 정권에 대한 집념을 포기하지 않았다.

집권기간 중에는 내치에도 일정부분 업적을 쌓았고 외세의 침략적 접근에 나름대로 대응하였지만 피폐한 백성의 삶 속에서 커지는 민중의식이나 국제정세의 흐름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여 대한제국을 근대국가로 전환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이는 8번 유형이 권력에 집중한 나머지 종종 통찰을 놓치는 경향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현상진 대전시민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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