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1월 22일자 대전일보 1면
1997년 11월 22일자 대전일보 1면
1997년 말 국가부도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 정부는 11월 22일 국제통화기금(IMF)에 200억 달러의 긴급 융자 신청을 공식화 했다. 당시 국내에서는 기업이 연쇄도산하면서 외환보유액이 급감했고, 외환보유액이 한때 39억 달러에 불과할 정도로 줄었다. 이에 정부는 IMF에 융자를 신청했고 12월 3일 195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받았다.

이 사태는 정부의 미숙한 대책이 문제였다. 동남아시아의 연쇄적 `외환 위기`에 정부는 안이하게 대응했고, 당시 대통령인 김영삼 대통령은 1997년 11월 10일 이뤄진 강경식 경제부총리와의 전화통화 전까지 외환위기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많은 회사들의 부도 및 경영 위기를 겪었고, 이 과정에서 대량 해고 등으로 인해 온 국민이 큰 고통을 겪었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금 모으기 운동`, `1달러 찾기 운동`이 이어졌으며 IMF 이듬해인 1998년에는 대규모 인원감축과 함께 신규채용은 전무해 취업대란이 오기도 했다.

1달러 찾기 운동을 벌이면서 초등학생에게 강압적으로 1달러를 가져오기를 권유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1달러를 가져오지 않으면 화장실 청소 등을 시키겠다는 말에 일부 학부모들은 은행에서 달러를 사서 학교에 제출하기도 했다.

20년 전 수능시험은 예정대로 11월 19일 치러졌다. 시험 난이도는 평이했으며, 기존 자신의 점수보다 보통 20점 이상 오르리라는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또 지금과 달리 신문의 상당 부분을 할애해 수능시험의 문제와 답을 게재했다.

대선후보 등록 전 진행된 여론조사에서 당시 김대중 후보가 36.4%를 기록해 1위를 달렸고, 이회창 32.8%, 이인제 27.1%로 뒤를 바짝 쫓고 있었다. 하지만 이회창 후보는 이전 지지율이 24.2%에서 8.6%나 뛰면서 DJP연합의 김대중 후보를 턱 밑까지 추격했고, 일부 언론사의 설문조사에는 김대중 후보를 제치고 선두로 올라서기도 했다. 막판까지 치열하게 순위 경쟁을 했고, 12월 18일 제15대 대통령 선거 개표 결과 김대중 후보가 1032만 6275표(40.3%)를 획득해 993만 5718표(38.7%)를 획득한 이회창 후보를 39만여 표 차로 간신히 누르고 제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김달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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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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