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어떤지 잘 모르겠으나 이전엔 어린애들을 보고 부모나 주위에서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며 놀리는 일이 많았다. 반신반의하며 울음을 터뜨리면 그것을 더 재미있어 했던 지난 날 어른들의 놀이였다.

그와 비슷한 표현으로 서양에서는 `황새가 물어다 주었다`고 한다. 물론 북유럽 설화에서 유래된 이야기지만 실상 황새의 수와 출생아의 수는 깊은 상관관계를 보인다고 하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황새의 수가 많을수록 출생아의 수도 많다는 얘기인데 과학자들까지 고개를 갸우뚱거릴 정도라 한다.

우리나라는 어느 해에 출생아 수가 가장 많았을까? 흔히들 58년생 개띠를 들기도 하지만 실은 1971년생 돼지띠가 최고이니 무려 102만여 명이었다. 그 해를 정점으로 이후 하향세를 타며 작년에는 40만 명을 겨우 넘겼다. 그런데 그 1971년은 우리나라 야생 황새의 자연 번식이 끝나버린 해. 그 해 충북 음성에서 황새부부 한 쌍이 발견되었지만 이내 밀렵꾼에 의해 수컷이 죽으면서 토종 황새의 맥은 끊어지고 말았다. 우연의 일치였겠지만 황새와 출생아는 이렇듯 이 땅에서도 신비와 연관을 맺는다.

`다리 밑` 얘기로 돌아가자. 다리 밑은 단순히 여성의 다리를 빗댄 은유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과도 관련된다. 본디는 `순흥 청다리 밑에서 주워왔다`였으며 그 다리는 지금의 경북 영주시 순흥면에 있었다. 1542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이곳 순흥에 처음으로 서원을 세웠고 이어 퇴계 이황이 명종으로부터 `소수서원`이라는 현판을 하사받아 사액서원(賜額書院)의 시초가 되며 소수서원은 이를테면 임금이 보증하는 조선 최초의 사립대학이었다. 각지에서 젊은이들이 모여들다 보니 이곳 여성들과의 핑크빛 사연은 없을 수가 없었다. 그로 인해 원치 않게 태어난 아기들은 대개 버려졌었고 이런저런 이유로 그 아기들을 거두어 키운 집안에서는 `순흥 청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했으며 세월이 흐르며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로 변했다고 한다. 지금도 이 다리는 제월교(霽月橋)란 이름으로 소수서원 옆에서 죽계천을 가로지르고 있다.

이와는 다른 설도 있다. 조선시대 세종의 육남(六男) 금성대군이 단종의 폐위와 관련하여 친형인 세조와의 반목 끝에 이곳 순흥으로 유배를 오게 된다. 2년 후 세조 3년(1457년) 단종이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고 마침 영월은 순흥과 소백산을 사이에 둔 가까운 거리. 금성대군은 순흥부사 이보흠을 비롯해 이 지역 사민(士民)들과 함께 단종복위의 거사를 도모한다. 그러나 순흥 관노(官奴)의 밀고로 탄로가 나며 순흥 사람들은 대학살을 당하게 되니 이른바 정축지변(丁丑之變). 번성했던 고을은 폐허가 되고 죽은 사람들의 피가 죽계천 20리를 붉게 물들였다 한다. 그 난리통에 많은 아기들이 청다리 근처에 버려지고 이를 불쌍히 여긴 관군들이 주워 길렀으며 그 아기들을 순흥 청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한 것이 다리 밑 이야기의 정확한 유래라고 한다.

소수서원 정문에서 죽계천 건너편을 보면 물가의 조그만 바위에 공경할 경(敬)자가 붉은 글씨로 새겨져 있다. 정축지변 당시 변을 당한 원혼들의 통곡소리에 밤잠을 설친 서원 원생들의 하소연에 주세붕이 그 원혼들을 달래기 위해 썼다고 한다. 청다리는 바로 그 위쪽 물길에 자리하며 금성대군을 기리는 금성단도 지척에 있다. 구석구석에 역사가 주저리주저리 열려 있는 곳이다. 유창영 대전보건대 인문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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