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안농원 뒤뜰로 물러나

꽃 대신 허공을 키우는 저 분,

금형수리공으로 일하다

일찌감치 현장에서 밀려난

고모부 불편한 여생 같은 분,

고혈압에 당뇨까지

중증으로 망가져

지팡이 짚고 온

하루치 고요를 거처 삼았네요

때 이른 서리에도

풀 죽는 법 없었는데

잎새들 수다와 풀씨들 연애,

촘촘 기록한 잔뿌리마저

겉장 뜯긴 일기처럼 바래어가고

울음인 듯 웃음인 듯

비와 바람의 무늬만 몸에 새겨요

매미가 붙여 준

귀뚜라미 한 마리 입양해 사는데

빈털터리 노후를 물려 줄 일이

깜깜 걱정이라 하네요

땡볕 불볕 폭염 가뭄 태풍 폭우. 그 힘겹던 여름의 일선에서 물러나 뒤뜰에 꽃 대신 허공을 키우는 저 분이라니. 허, 허, 허. 허공이 비로소 제 격에 맡는 구실을 하는 찰나다. 거기에는 반드시 허공이 있어야지. 허공 없이 어찌 그 뒤뜰이 존재하랴. 그곳은 고모부의 병 깊은 중증의 몸처럼 지팡이 없이는 또 하루의 시간도 허락지 않느니. 담장에 기대어 서있는 한 그루 감나무만이 생을 안다 하겠다. 지난 날 때 이른 서리에도 기골이 창대하던 옛 기품 다 사라지고. 어느새 겉장 뜯긴 일기처럼 빛바래어 비와 바람의 무늬만 제 가슴에 깊게 새기고 있는가.

오고 가는 계절 속에도 가을은 언제나 저절로 사색이 깊어져 철드는 시간. 잎새들 수다와 풀씨들의 연애, 그리고 촘촘히 기록한 잔뿌리마저 빛을 비워 더욱 빛이 나는 때. 허공을 배경으로 서면 그 모든 장면도 한 장 절묘한 사진으로 새겨지는 삶의 경지. 이 가을 나도 귀뚜리 한 마리 입양해 노래나 한바탕 신나게 불러 볼까. 가을은 벌써 왔는데. 가을엔 편지를 쓰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그건 울음인 듯 웃음인 듯 구분을 넘어선 경계. 아, 그러고 보니 귀뚜라미가 진정한 시인이다. 가을은 귀뚜라미가 먼저다. 김완하 시인·한남대 국어국문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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