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반정 세력들의 도덕정치와 친명반청(親明反淸)이란 대내·외적 정책기조는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의 주요원인 중 하나였다. 청군에 맞서 남한산성으로 몽진해 항전의지를 다지던 인조는 주화론자의 뜻대로 이듬해 1월 30일 강화가 성립되자 청태종에게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라는 치욕스런 항복의식을 강요받았다.

이때 최명길이 강화를 청하는 국서(國書)를 썼는데 척화론자인 김상헌은 그 글을 찢고 대성통곡하면서 나무랐다고 한다. 이에 그는 "대감은 찢었으나 나는 이것을 주워 붙여야 합니다"라고 하면서 청에 보내는 답서를 주워 모았다(인물한국사).

최명길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3번이며 별칭은 `성취자`이다. 이들은 목표 중심적이며 긍정적이다. 사람들과 대화하는 법을 잘 알고 있다. 어떠한 난관에서도 결과를 이끌어내는 능력이 있다.

1586년(선조 19년)에 태어난 최명길은 20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홍문관 전적을 거쳐 광해군 조에는 병조좌랑에서 삭직(削職)되었으나 인조반정 이후 정권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였고 병자호란을 전후하여서는 이조·호조·병조판서를 역임하였으며, 세간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호란에 대처한 공로로 우의정·좌의정 자리에까지 올랐다.

최명길의 강화론은 국력이 뒷받침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무모한 항전은 온 나라가 유린당하고 왕조가 붕괴될 수밖에 없으니 비굴하더라도 나라만은 지켜야겠다는 논리였다.

`조선왕조실록`은 그를 가리켜 "기민하고 권모술수에 능했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화의론을 주장하여 선비들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적고 있다(인물한국사). 당시 조선은 대의명분을 중시하던 사회였으므로 이러한 평가가 얼마나 객관적이었는지는 의문이다.

1570년(선조 3년)에 태어난 김상헌은 26세에 과거에 급제해 중·하위 관직과 지방직을 역임하다가 인조반정 이후 전란 전까지 형조·예조·공조판서, 우참찬·대사헌 등 요직에 임명되었지만 대부분 사양하고 은거하였다.

김상헌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5번이며 별칭은 `탐구자`이다. 이들에게 인간관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이들은 사람 자체보다 그들의 매우 뛰어난 특성과 관계를 맺고 싶어 한다. 이상주의적이며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현실적인 정서를 무시하기도 한다. 그는 현실보다 이념적인 가치에 치중했다.

병자호란 발발 시에도 은거중이던 그는 남한산성으로 몽진한 조정을 뒤따라가 척화와 항전을 주장했다. 화친 이후 청나라로 끌려갔을 때에는 심양에서 대표적인 주화론자인 최명길과 화해하였다고 한다. 효종 조에는 좌의정에 제수되었지만 출사하지 않고 다시 은거하였다. 효종은 그에게 대로(大老)라는 존칭을 내렸으며, 전란 중에 강화도에서 순절한 그의 형 김상용과 함께 조선 사회에서 충신·열사로 평가받았고 안동 김문은 명문으로 떠올랐다.

병자호란 당시 최명길은 3번 유형답게 국가보존이라는 현실을 중시했고, 김상헌은 5번 유형답게 통치이념과 가치를 중시했다. 두 사람의 판단과 처신 중 무엇이 옳았는가에 대하여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되새겨볼 일이다. 현상진 대전시민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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