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차 왕자의 난 이후 함흥에서 돌아온 태조에 대한 환영연회 때 하륜은 세자 이방원에게 직접 술잔을 올리지 말고 내관을 시켜서 대신 잔을 올리라고 권했는데, 태조는 뒤에 숨겨둔 철퇴를 상에 내리치면서 `모두가 하늘의 뜻이다`라며 탄식했다고 한다. 하륜은 태종의 장자방(張子房)이었다. 만일 하륜이 없었다면 이방원은 임금은커녕 목숨을 부지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륜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3번이며 별칭은 `성취자`이다. 그의 성격특성은 `허영`과 `명예`라는 격정으로 규정된다. 이 유형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다음과 같다.

이들은 돋보이고 싶고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한다. 사람들과 대화하는 법, 계층을 오르는 법을 잘 알고 있다. 최대의 이익을 얻기 위해 집중하며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한 이미지 메이킹에 능하다.

1347년에 태어난 하륜은 1365년(공민왕 14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당시 시험관이기도 했던 스승 이인복은 하륜의 사람됨이 큰 것을 보고 아우 이인미에게 천거하여 사위로 삼도록 했다. 하륜은 고려 왕씨 정권에서 젊은 나이에 이미 사간원 우부대언, 중추원 밀직제학, 전라도도순찰사 등 고위직을 지낸 보수 기득권 세력이었고, 권신 이인임의 조카사위로 그의 후원을 받았으므로 정치적으로는 신진 사대부들과 대립된 입장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색의 문하에서 정몽주, 조준, 정도전 등과 동문수학하며 이들과도 교분을 유지했다. 즉 학문은 또 다른 스승 이색에게 배웠지만 정치적 스승은 이인임이었다.

그는 스승 이인복이 동생인 이인임과 친하지 않은 것과 달리, 이인임과 가깝게 지내면서 그의 심복이 되어 실물정치를 배웠다. 그것은 시대의 조류에 맞추어 항상 우세한 지점에 서는 것이었다. 그는 이인임에서 이성계로 다시 이방원으로 권력의 향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였다. 필요에 따라서는 특정 권력에 치우치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제공함으로써 위험 요인을 최소화하고 최대한의 이익을 얻어낼 수 있었다.

태종 즉위 후 공신들이 태종으로부터 견제를 받을 때도 하륜만큼은 예외였다. 넘지 말아야 할 경계를 철저히 지키면서 임금의 통치기반 강화에 필요한 아이디어를 지속적으로 제공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신하들의 빗발치는 질투에도 불구하고 건재할 수 있었다. 이것은 그의 성격특성에 충실한 것이었다. 어떠한 경우에도 우세한 지점을 선점하는 것, 중요한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 성공에 필요한 이미지는 철저히 유지하는 것 등이다.

고려 정권에서 신돈의 문객인 양전부사(量田副使)의 비행을 탄핵하고 신돈의 권력이 지나치게 비대해짐을 비판하다가 좌천, 파직되기도 했는데 이때 겪은 고초는 그에게 뼈아픈 교훈이 되었을 것이다.

그가 왕조가 바뀌고 권력이 이동하는 정치적인 격변기에도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은 3번 유형다운 유연한 처세 덕분이었다. 현상진 대전시민대학 강사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