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종 7년(1856년) 봄 여주 지방에 대형 화재가 일어나자 임금은 1,000여 호의 민가에 은자(銀子)와 단목(丹木)을 내려 주어 구활하게 하였다. 또한 함흥의 화재민에게도 3000냥을 지급하였다. 이 해 7월에는 영남의 수재 지역에 내탕금 2000냥, 단목 2000근, 호초(胡椒) 200근을 내려주어 구제하는 등 빈민구호책을 적극 실시하였다(민족문화대백과).

철종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2번이며 별칭은 `조력자`이다. 그의 성격특성은 `자만`과 `야심(Ambition)`이라는 격정으로 규정된다. 이 유형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다음과 같다.

이들은 교만한 유형이다. 야망 때문에 필요한 사람들을 알고 있으며, 중요한 일들을 하고, 리더의 위치에서 동경을 받고자 한다. 영향력있고 지적이며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만들고 싶어 한다. 이들은 최대한 얻어내기 위하여 준다. 이들이 줄 때는 언제든지 무엇인가를 얻기 위한 전략적 시각과 계획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무의식 수준에서 일어난다.

1831년 정조의 이복 동생인 은언군의 아들 전계대원군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1849년 6월 헌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순조비인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명으로 정조의 손자, 순조의 아들로 하여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 19세였다.

철종은 형인 회평군의 옥사로 가족과 함께 강화도에 유배되어 농사일을 하다가 갑자기 왕의 자리에 올랐으므로 제왕의 수업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학문적 수준은 떨어지고 주변에 아무런 지지기반도 없었다. 3년간 수렴청정 기간을 거치고 친정을 수행하였지만 안동 김씨 세도의 정치 환경에서 그가 운신할 범위는 매우 좁았다. 그러나 성격특성인 `야심`은 어려운 처지에서도 백성들에게 무엇인가 베풂으로써 좋은 임금이라는 평가를 듣고 싶도록 추동하였다.

1853년에는 관서지방의 기근대책으로 선혜청(宣惠廳)·사역원(詞譯院) 등의 기금을 백성들에게 내주어 구활토록 했으며, 그 해 여름의 가뭄에도 적극 대응했다. 1862년 진주 민란에는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이라는 임시특별기구를 설치하여 민란의 원인이 된 삼정의 폐해를 바로잡기 위한 정책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세도정치가 지배하는 당시의 정치 환경은 그의 `야심`에 걸림돌이 되었고 상실감은 컸다. 이러한 심리적 요인은 그가 주색에 빠져들게 했고 건강을 해쳐 결국 32세에 요절하였다.

2번 유형은 따스한 마음으로 늘 타인을 배려하고 주변에 온정적인 활기를 불어넣으며, 타인의 필요에 맞추기 위해 애쓰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전략적으로 적응함으로써 타인을 통해 자신의 욕구를 간접적으로 충족시키고자 하는 것일 수 있다. 이것이 의도대로 되지 않으면 이를 관철하기 위하여 다양한 방법의 조종을 시도하기도 하며, 때로는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이들이 보다 충만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성찰을 통하여 격정인 `자만`을 미덕인 `겸손함`으로 변화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현상진 대전시민대학 강사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