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여학생 폭력문제가 연일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부산에서도 강릉에서도 아산에서도 여고생 혹은 여중생이 동료학생 또는 청소년들로부터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가는 폭행을 수시간동안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다. 국민들은 엄청난 분노를 표출하고 있고 청소년법을 폐지하라는 청원이 순식간에 폭발적인 호응을 얻고 있다.

무엇이 문제였던가. 우리는 수십 년전부터 한국의 높은 교육열을 자랑하고 칭송하고 있다. 또 그런 교육열이 지금의 한국의 발전상에 많은 기여를 한 것도 사실이다. 허나 실상은 사람이 아닌 점수기계를 만드는데 만 몰두해 온 게 우리 교육 현실인 듯하다. 초등학교부터, 아니 심지어 유아시기부터 조기교육이라는 미명하에 엄청난 시간과 비용을 들여 사교육에 몰두하고 공교육은 그저 마지못해 유지하는 형국이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은 무슨 짓으로 해도 용인이 되고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은 상대적으로 밀려나거나 사회의 부작용에 휩쓸려 비행청소년이 되기도 한다. 이게 과연 제대로 된 나라이고 교육인가? 미술시간에 선생님이 사과를 앞에 놓고 그대로 그리게해서 가장 똑같이 그리게하는 학생에게 최고의 점수를 주는 정물화만 존재한다면 그 미술이란 게 예술일수가 없다. 추상화도 수채화도 초현실주의적인 작품도 존재하고 그것이 많은 칭송을 받는 이유는 사고의 자유로움 창작의 자유로움에 있다. 물론 수학이나 화학 같은 과학은 근거가중심이고 수식이란 게 결국 `1+1=2`라는 엄정한 불변의 진리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학생들이 그 수학이나 화학 그 자체의 지식도 중요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파생되는 다양한문제 해결을 접근하는 방식은 굉장히 다양하고 창의적일 수도 있어야 한다.

한국의 도시이름을 보라. 거의 대부분이 두 글자이다. 사람 이름은 또 어떤가? 거의 대부분이 세 글자로 되어있다. 거리를 질주하는 자동차들은 거의 대부분 흰색이 아니면 검은색 일색이다. 자동차 번호판도 내용의 형식이 정해져있다. 학교를 보아도 늘 3월 개학에 1년에 2학기가 표준이다. 우리 사회는 과거 여러 노력으로 엄청난 양적 질적 발전을 이루었지만 그것은 사물이나 물체의 발전에만 국한된 것은 아닌가?. 사람의 기본적이고 인간을 인간답게하는 인성에는 왜 그리도 무신경했는가를 자성해야 한다. 또 기계로 만들고 그를 칭송하는 것 보다 인간을 만들어내는 교육이나 사회환경에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사실 이번 사건의 모든 가해자나 피해자는 실제 모두 피해자이다. 물론 가해자들의 그 뻔뻔하고 짐승 같은 수준의 잔인함과 폭력성은 법정최고형을 받아 당연하지만 우리가 이제까지 최고의 가치로 여겨왔던 획일화의 엄청난 피해자들은 아닌지 생각해볼 일이다. 다양성을 인정하고 인간의 가치를 공고히 여기고 중요시하는 교육과 사회의 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경제성장으로 인해 얻은 최대의 과실이 인간을 동물보다 못한 존재들을 양산한다면 정말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늘 이 사회가 얼마나 경직되어있는 지를 일상에서 너무나 자주 경험한다. 상식적으로 말도 안되는 일이 너무 자주 벌어져서 아주 큰 이벤트가 아니면 심드렁한 수준까지 와있다. 사람이 한둘 바뀐다고 해서 해결되거나 바뀔 수는 없다. 결국 시스템의 문제이고 가치관의 문제라 하겠다. 누구나 자기중심적이고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데 온갖 신경을 집중하지만 이제조금은 타인을 더 생각하고 내가 그 입장이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의 전환이 절대 필요하다.

교육이 변해야 한다. 최근의 여러 대안 학교나 혁신학교들이 벌이고 있는 실제 교육현장의 값진 내용이나 프로그램들이 사실 전국 모든 학교에서 기본 프로토콜이 되어야 한다. 그러고도 한국이 발전하고 튼튼하다는 명확한 발전지향적 목적의식과 확신이 있어야 한다. 물론 변화는 늘 두렵고 온갖 이해관게도 얽혀있다. 변화가 없으면 발전도 없다. 학교가 변하면 사회도 나라도 변하지만 더 중요한건 사람이 변한다는 거다. 제발 더 이상 교육현장에서 끔찍한 일들이 뉴스를 장식하는 일이 없도록 온 사회가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최상규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방사선종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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