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즉위년(1418년) 11월, 명나라에 사신으로 간 세종의 장인 심온에 대한 옥사가 있었다. 훗날 세종의 왕권에 대한 위협을 사전에 제거하고자 한 태종의 의중에 따른 것이었다. 이 일로 심온의 집안은 쑥대밭이 되었다. 그의 아내와 자녀들까지 천인 명부인 천안(賤案)에 올랐고, 옥사에 앞장선 대신들은 심지어 세종비인 소헌왕후 심씨의 폐위까지 거론할 정도였다. 이 억울한 옥사에서 세종 8년 세종의 장모 안씨가 천안에서 빠지고, 문종 1년(1451년) 심온의 관직이 회복되었지만, 태종의 사후에도 세종은 관련자들에 대한 보복을 하지 않았다(이덕일, 2010).

세종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9번이며 별칭은 `조정자`이다. 그의 성격특성은 `나태`와 `참여(Participation)`라는 격정으로 규정된다. 이 유형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다음과 같다.

이들은 관대하며 집단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보상하려 한다. 일 중독자일 수 있고 사회성이 있으며 잘 즐기지만, 열심히 일할 때에는 자신의 고통은 돌보지 않고 스트레스도 남에게 전가하지 않는다. 너그럽고 이타적이며 자신의 책임을 완수하려 한다. 집단 내 모든 사람의 의견을 수용하고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서로 다른 의견을 중재하고자 한다.

1418년 6월, 태종의 셋째 아들 충녕은 폐위된 양녕 대신에 왕세자에 책봉되고 두 달 후에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으니, 그가 조선의 4대 왕 세종이며 이때 그의 나이 21세였다(박영규, 1996).

세종은 선대 왕이 이룩해 놓은 왕권의 안정을 바탕으로 정치·경제·문화·사회 전반에 걸쳐 기틀을 확립하였다. 그는 백성을 위한 것은 어떠한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실행하려 했고 필요한 추진력을 발휘했다. 이는 일 중독으로 나타났고 수반되는 스트레스도 잘 내색하지 않았다. 유교정치에 대한 깊은 소양, 학문적 호기심과 성취, 역사·문화에 대한 통찰력, 중국문화에 대한 주체성 등도 그의 성격특성의 격정인 참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는 과정은 놀랍기만 한데, 그 어려운 환경에서도 거의 독자적으로 큰 파열음도 없이 목표를 달성한 것은 백성에 대한 희생적인 사랑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성격특성답게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엄청난 인내력으로 자신이 믿는 정책을 밀어붙였다. 그는 해결해야 할 문제 앞에서 물러서지 않았고, 갈등의 순간마다 조정 또는 수용의 자세를 보였다.

9번 유형은 갈등상황에 공격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관망하고 조정하는 태도로 상황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자 한다. 이들에게는 타인에 대한 이해와 관용적인 여유로움 속에서도 원천적인 목표를 놓치지 않고 달성해 내는 힘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평화를 추구한 나머지 갈등 상황에서 문제 해결을 회피하며, 반드시 이행해야 할 중요한 일들을 의식적으로 미루어 놓고 무기력 상태에 빠지기도 한다.

이들은 자기 성찰을 통하여 격정인 나태를 미덕인 행동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의도하는 성취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현상진 대전시민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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