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소련 시절 러시아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틀에 부합하는 예술가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물론 쇼스타코비치와 프로코피에프 같은 음악가는 당국과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정치와 예술 사이에서 고뇌를 거듭하기도 했다. 그 결과 20세기 중 후반 세계 음악계를 주름 잡은 연주자 가운데 70% 이상이 러시아 출신이라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특히 피아노는 국기(國技)라 할 만큼, 모래알처럼 많은 피아니스트가 철의장막 속에서 정책적으로 육성되어 왔다.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당국은 국가에서 키워낸 뛰어난 연주자들을 서방에 알리고 소비에트 예술의 위대함을 세계에 자랑할 만한 제도적 장치가 필요했다. 마침내 1958년 그 첫 번째 결실이 국제 콩쿠르라는 이벤트로 만들어졌다. 구소련 최초의 여성 문화부 장관 예카테리나 푸르체바가 모든 과정을 총괄했다. 대대적인 홍보는 물론 전 세계에서 심사위원을 위촉했다. 피아노 부문에서는 길렐스가 심사위원장을 맡고 카발레프스키, 네이가우스, 리히테르 등 이름만으로도 입이 떡 벌어지는 스타 연주자들로 망라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승은 미국 출신 피아니스트 반 클라이번에게 돌아갔다. 서방에 자국 연주자를 진출시키기 위한 경연장에서 미국인이 축배를 든 셈이 되었다. 클라이번은 귀국 후 미국의 영웅이 되었다.

1962년 미국은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를 염두에 두고 반 클라이번 콩쿠르를 창설했다. 4년마다 열리는 것도 같았다. 지난 6월 10일 미국 텍사스 포트워스에서 낭보가 날아들었다. 피아니스트 선우예권(28)이 15회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한 것. 이는 2년 전 조성진이 쇼팽 콩쿠르에서 1위를 한 이후 우리 피아니스트가 일군 또 하나의 엄청난 쾌거였다.

벌써 13년 전이다. 당시 예원학교에 다니던 선우예권에게 러시아 작곡가의 음악은 가슴으로 연주해보라고 한 적이 있다. 피아노 협주곡 가운데 가장 난곡으로 꼽히는 라흐마니노프의 협주곡 3번은 영화 `샤인`에서 주인공의 운명을 결정짓는 음악으로 나온다. 결선에서 건강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이 곡을 연주해 심사위원을 경탄케 했던 선우예권은 지난해 대전예술의전당에서도 라흐마니노프를 연주했다.

지난 주 발매된 선우예권의 콩쿠르 실황 앨범에는 라흐마니노프의 소나타 2번이 메인으로 수록되어 있다. 우연일까? 선우예권의 레퍼토리 가운데 라흐마니노프가 유독 많다. 그런데 이번 음반의 라흐마니노프에서는 묘한 러시아의 에스프리가 풍겨져 자꾸 듣게 만든다. 미국 망명 시절 라흐마니노프는 친구 월터 쿤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음악은 가슴에서 솟아나, 오로지 가슴으로 얘기를 걸어온다.`고 했다. 선우예권의 라흐마니노프에는 요즘 젊은 연주자들이 간과하는 `가슴`이 스며있다. 유혁준 음악살롱 클라라하우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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