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이 화폐에 큰 의미를 두면서도 액면 외에 디자인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 듯하다.

화폐는 문명사회에서 재화를 구매하는 결제의 수단으로 통용된다. 그러면서 한 나라의 문화와 역사를 포함해 국민의 보편적 정서를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화폐 디자인은 이런 측면에서 국가의 문화적 정체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그 나라 대표 예술품이라고 볼 수 있다. 화폐는 국가가 지정하는 법화(法貨)다. 그래서 디자인 결정 과정도 까다롭다. 발권기관인 한국은행이 화폐의 기본 형태를 만들기 위한 발행계획을 세운다. 인물, 주제 등의 소재 선정, 위조방지장치 설계, 세부 디자인을 만들고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화폐도안자문회의를 거쳐 최종 디자인을 확정하는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 다음부터는 은행권 제조 프로세스에 맞춰 디자인 작업이 진행된다. 화폐 디자인은 일반 상업 디자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섬세한 작업 과정을 거친다. 초상인물의 미세한 선 하나하나는 물론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수많은 패턴과 문양을 세밀하게 그려 넣는다. 또한 위조가 발생하지 않도록 홀로그램, 보안잉크, 용지 등의 위조방지장치에 최적화된 디자인을 설계한다. 이런 과정이 마무리되고 용지제조에서부터 인쇄까지 모든 공정도 문제가 없다고 판단될 때 본격적으로 화폐를 발행하게 된다. 새로운 돈이 내 지갑 속에 들어오기까지 디자인 단계부터 대략 2년이 걸린다.

우리나라 은행권은 1983년 발행권부터 한국조폐공사의 기술력과 디자인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그 이전인 1970년대 초에는 기술력이 부족해 영국의 토머스 데라루(Thomas De La Rue)사에 은행권 인쇄 종판(요판) 제작을 맡겨야 했던 안타까운 과거가 있다. 1972년에 발행된 만원권의 세종대왕과 5000원권의 율곡 이이 초상은 서양인이 인쇄판을 조각하다 보니 서양인처럼 코가 오뚝하게 보인다. 세종대왕께서 이를 보셨다면 뭐라고 하셨을까? 그후 2007년에 새로운 은행권(1000원권, 5000원권, 만원권)이 발행됐는데 인터넷 등에서 `세종대왕은 성형남`이라는 말이 퍼진 적이 있다. 돈이 바뀔 때마다 인상이 조금씩 달라진 것을 성형수술에 빗댄 네티즌의 패러디다. 1970년대 초부터 만원권의 세종대왕 초상 디자인은 3차례 변경됐다. 이전 은행권의 세종대왕이 50대였다면 최근 발행된 만원권 세종대왕은 40대의 `꽃중년`으로 점점 젊어졌다. 화폐 디자인도 시대적인 추세에 맞추어 조금씩 변화해가고 있다.

2009년에는 세계 최첨단 위조방지장치를 적용한 고액권 오만원권이 발행됐다. 뒷면은 우리나라 은행권 최초로 세로형으로 디자인하였고, 초상인물도 여성인 신사임당을 적용했다. 어머니 신사임당(오만원권)과 아들 율곡 이이(5000원권)가 현재 사용하는 은행권에 함께 적용된 것은 세계적으로 그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디자인 개발에 참여하면서 든 생각인데 자식에 대한 `모성애(母性愛)`가 강한 우리나라의 정서가 반영된 게 아닐까 한다.

이제 몇 달 후면 평창 동계올림픽이 열린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한국은행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기념은행권을 발행한다는 기사와 함께 디자인이 공개된 바 있다. 그 작은 지폐 속엔 한국조폐공사의 최첨단 기술력과 화폐디자이너의 섬세한 손길, 모든 직원의 여망이 담겨 있다. 역사적인 기념은행권이 국민들 앞에 선보일 그날을 기대해본다.

김종희 한국조폐공사 디자인연구센터 신제품연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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