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평대군은 널리 알려진 것처럼 서예를 포함한 예술 분야에서 출중한 능력을 보였다. 그는 고려 말부터 유행한 조맹부의 송설체(松雪體)에 특히 뛰어났는데 중국 황제에게까지 알려질 정도였다.

안평대군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4번이며 별칭은 `예술가` 또는 `개인주의자`이다. 그의 성격특성은 `시기심`과 `경쟁`이라는 격정으로 규정된다. 이 유형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다음과 같다.

이들은 자신의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벌을 주려고 한다. 내면의 동기는 경쟁의 형태로 나타나고 최고를 추구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타인에게 좋은 이미지를 주고자 하지만 이들에게는 우월한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러므로 욕망을 채우기 위해 친절과 이미지 관리는 보류한다. 이들은 대체로 거만하며, 자신의 뻔뻔함이 거부당했을 때 분노가 표출되기도 한다. 이들은 매력적이고 강렬하여 이들과 사귀는 것만으로도 흥분될 수 있다.

안평대군 이용(李瑢)은 1418년에 네 살 위인 문종, 한 살 위인 세조에 이어 세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감성이 풍부하고 예술가적인 기질이 강한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그러므로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시·문·서·화에 모두 능했다. 수많은 책을 수장하였으며 문인들을 초청하여 시회(詩會)를 베풀고, 당대 제일의 서예가로서도 높은 경지에 올랐다.

한편으로는 정치권력에 대한 의지도 만만치 않았다. 함경도에 육진이 설치되자 1438년 왕자들과 함께 야인 토벌에 참가하였으며, 고명대신인 황보인·김종서 등 문신들과 제휴, 수양대군 측의 무신 세력과 맞서 인사 행정의 하나인 황표정사(黃票政事)에 관여하는 등 점차 조정의 배후 실력자로 등장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그러나 안평대군은 태생적으로 권력의지가 충만한 수양대군의 상대가 되기에는 버거웠다. 그의 성격유형대로 논리적이기보다는 너무 감성적이어서 권력을 움켜쥐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게다가 그의 격정에서 비롯된 경쟁심은 수양대군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단종 즉위 후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수양대군은 그를 견제하기 위하여 황표정사를 폐지해버리기도 하였다.

안평대군이 권력을 얻고자 했다면 보다 치밀한 준비와 실행력이 요구되었지만 그의 성격유형이 의미하는 예술가답게 어설펐다.

1453년 10월 10일 계유정란으로 황보인·김종서 등이 살해되던 날 안평대군은 이들 대신과 결탁해 단종을 몰아내고 집권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8일 만에 35세의 나이로 사사되었다. 그가 수양대군에 의해 제거된 것은 전형적인 문인이 타고난 무인기질의 사람과 권력을 놓고 벌인 치열한 경쟁의 결과였다.

4번 유형에게는 자기성찰적인 태도와 직관력, 창의성이 뛰어나고,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함께 예술적인 영감이 발휘되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의 성격특성인 시기에서 비롯되는 정서적 습관으로 감정의 기복이 심하여 이성적인 사고를 종종 마비시키기도 하므로, 평정심을 토대로 객관적인 판단을 습관화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현상진 대전시민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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