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건국의 주역 중 하나인 정도전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1번이며 별칭은 `개혁가`이다. 그의 성격 특성은 `분노`와 `열의`라는 격정으로 규정된다. 이 유형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다음과 같다.

이들은 완벽주의자로서 자신을 올바르고 정의로우며 도적적인 사람으로 인식한다. 분노가 강렬하여 타인과 주위를 그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개선하고자 하며, 그 결과를 예측하고 흥분과 열정을 느낀다. 지나치게 비판적이고 강박적인 태도와 선입견 등은 이들의 단점으로 지적된다.

정도전의 청·장년 시기인 고려 말기는 왜구·홍건적의 외침으로 대외적으로 안정되지 못했으며, 국내 상황은 권문세족의 횡포로 정치적 기강이 무너지고 민생은 궁핍하였다. 그는 이러한 정치·사회 상황을 모순덩어리로 보았고 이를 개혁함으로써 자신의 분노와 욕망을 발산하고자 했다. 여기에 필요한 지렛대가 이성계였다.

이성계와 정도전의 만남은 혁명무력과 혁명사상의 결합이었다. 이성계가 고려 말 중앙정치 무대에 핵심으로 등장하게 된 계기는 위화도 회군이었다. 사서의 기록은 위화도 회군이 큰 저항 없이 순조롭게 이루어진 것으로 전하고 있으나 여기에는 의문이 따른다. 이 기록들이 위화도 회군은 천명(天命)에 따른 것이라는 인식을 바탕에 두고 후대에 작성된 사서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회군 정국은 그 정당성 여부를 포함하여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정도전은 대사헌 조준에게 토지개혁에 관한 상소문을 올리게 함으로써 일거에 토지개혁 정국으로 전환시켜 버렸다.

당시는 권세가들의 불법적인 사전(私田) 확장이 문제였다. 정도전은 모든 백성에게 토지를 나누어주는 이른바 계민수전(計民授田)을 단행해 토지개혁을 개국의 명분으로 삼고자 했다. 비록 과전법으로 후퇴하기는 했으나 이것은 백성들이 전적으로 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1392년 우여곡절 끝에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해 이루어진 조선개국은 정도전이 염원하던 개혁의 실습장이었다. 우선 `조선경국전`을 편찬해 법제도의 틀을 닦았으며, 도읍을 옮겨 새 왕조의 면모를 높였고, `경제문감`을 저술해 재상, 대간, 수령, 무관의 직책을 확립하였다. 또한 명의 횡포에 대하여 요동 정벌을 계획하고 진법훈련, 사병 혁파 등을 적극 추진해 병권 집중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개혁은 사병 혁파에 위기를 느낀 이방원에 의해 중도에서 좌절되고 말았다. 정도전은 세자 방석을 교육시켜 재상이 중심이 되고 성리학적 이념에 바탕을 둔 왕도정치의 실현을 꿈꾸었지만, 왕권과 자신의 입지 약화를 우려한 이방원은 그를 살해하고 세자도 죽여버렸다. 이때가 1398년으로 정도전의 나이 62세였다.

1번 유형의 격정인 `분노`와 `열의`는 흔히 너무 통제적이어서 자신과 타인 그리고 주위의 자연스러움이나 활기를 그대로 인정하기 어렵다. 그리하여 의도하던 완벽한 마무리와는 반대로 일의 실패로 귀결되는 사례를 자주 보여준다. 1번 유형에게는 자신의 격정인 분노를 인식하고 다스릴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현상진 대전시민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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