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대전시가 된 회덕은 조선조 내내 강직(剛直)함으로도 그 이름을 드높인다. 우선 우암 송시열. 원래 옥천 태생이나 일찍이 회덕에 터를 잡았다. 다음으로 단재 신채호. 회덕현 산내, 지금의 대전 중구 어남동에서 태어났다. 꼿꼿함으로 치자면 우암도 울고 갈 사람. 여덟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청주로 옮겨갔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 박팽년(朴彭年·1417-1456). 순천 박씨로 회덕현 흥룡촌 왕죽구(王竹丘·왕댓벌), 현 대전 동구 가양동 출신이다. 대전보건대학교 앞에 그 생가 터와 유허비가 보존되고 있으며 충정로는 그의 시호 충정(忠正)에서 유래한다. 나이 열여섯에 생원, 열여덟에 문과에 급제. 한 마디로 천재였다. 집현전의 그 쟁쟁한 학자 중에서도 경학 문장 글씨 등 모든 면에서 단연 뛰어나 `집대성(集大成)`이란 칭호를 얻었다. 성품은 어질고 과묵했으나 한 번 세운 뜻은 무슨 일이 있어도 꺾지 않았다고 한다.

1456년 단종 복위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모진 고문을 받는다. 그의 뛰어난 재주를 아낀 세조는 수차 회유하였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았고 그간 세조에게 올린 보고서에도 결코 본인을 신(臣)이라 하지 않고 거(巨)라 하여 조롱하였으며 세조에게 받은 녹(祿)은 모두 창고에 봉해 두었다. 처형을 앞두고 고문의 후유증으로 옥중에서 죽는다.

이어 부친을 비롯해 형제 아들들도 죽음을 맞고 모친 부인 며느리는 노비가 되어 흩어지며 멸문지화를 당하지만, 여기서 하나의 기적 같은 일이 발생한다. 며느리이자 차남 박순의 처 성주 이씨는 친정이 있는 대구에 관노(官奴)로 가게 되고 마침 임신 중이었다. 아들이면 죽음을 당하고 딸이면 노비였다. 그런데 친정집의 한 여종이 바로 그 무렵 출산을 앞두고 있었다. 얼마 후 두 사람은 해산을 하게 되니 이씨는 아들이었고 여종은 딸이었다. 위기일발의 순간 이씨는 친정의 도움으로 몰래 아들을 여종의 딸과 바꿔치기를 하며 그 아들은 목숨을 건졌고 결국 박팽년은 천금 같은 혈육을 남기게 된다. 그 손자는 박비(朴斐)라는 묘한 이름으로 외가의 고향인 `묘(妙)골`에 숨어서 살게 되니 이곳이 지금의 대구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妙里). 이름 그대로 묘한 사연을 품은 곳이며 지척에 낙동강이 흐른다.

박비가 열일곱이 되었을 때 이모부이자 경상감사 이극균이 조정에 자수를 권유하였다. 박비는 한양으로 가 자수를 하였고 당시 임금 성종은 충신의 아들이라며 용서하고 박일산(朴壹珊)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박일산은 떳떳해진 신분으로 묘골을 고이 지켜나간다. 선조 때 이 마을의 박계창이 고조부 박팽년 제사를 지내는 날, 낯선 사내 다섯이 사당 밖에서 서성대는 꿈을 꾸었다. 그들이 고조부의 사육신 동료이었음을 깨닫고는 그때부터 그 다섯 분도 함께 사당에 모시고 제사를 지내니 그 제사는 지금도 이어진다. 한때 국회의장을 오랫동안 지내며 TK 대부라고 불리던 박준규와 삼성 이병철회장의 부인 박두을 여사도 이 마을 출신이다.

박팽년은 마흔의 나이로 비명에 갔지만 그나마 저 멀리 낙동강변에 자손을 일구었고 외로이 저승에서 떠돌던 동료들을 불러 모아 해마다 다 같이 제사상을 받았다. 올해 정유년은 그가 태어난 지 꼭 600년. 세월은 수없이 흘렀지만 그래도 혹시 아는가? 그의 넋이 어릴 적 뛰어놀던 흥룡촌 왕댓벌 아니 대전 가양동에 찾아와 서성거릴지. 유창영 대전보건대 방송문화콘텐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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